B-29

-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4월 25일 (토) 15:16 판 (문자열 찾아 바꾸기 - "제 2차" 문자열을 "제2차" 문자열로)

B-29 Superfortress

미국 육군항공대(1948년 이후 공군) 및 영국 공군에서 운용한 4발 장거리 전략폭격기. 1942년에 초도비행에 들어가 1960년에 퇴역했으며, 그 기간동안 있었던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에서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개발 및 생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38년이다. 이때 미국은 이미 B-17 플라잉포트리스 폭격기를 개발, 양산을 진행중이었지만 보다 먼 거리에 있는 목표를 타격하기 위한 장거리 전략폭격을 위해 새로운 폭격기 개발을 요구했다. 미 육군항공대는 4,290km 떨어진 목표까지 평균 640km/h의 속도의 비행한 후 2만파운드, 약 9,100kg의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올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엄청난 사양을 요구했다. 이에 록히드(XB-30)와 더글러스(XB-31)는 얼마 안 가 포기했고, 최종적으로 보잉만이 남아 1940년 8월에 2기의 프로토타입 기체, 2기의 XB-29를 내놓았다.

미 육군항공대는 XB-29의 비행테스트 끝에 최종적으로 보잉과 계약, 1941년 5월에 250기의 B-29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미국은 유럽대륙의 전쟁에서 독일이 전면적인 승리에 직면했다고 보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미군이 확보할 수 있는 기지에서 독일 본토를 폭격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B-29는 당시로선 유래가 없는 초대형 항공기였고, 때문에 제작 및 생산도 특정지역이 아닌 미국 본토 각지에 분산된 공장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핵심 공장만 해도 네브래스카, 워싱턴, 캔자스, 조지아 4개 주에 분산되어 있었고, 수천여 개의 공장에서 온갖 부품을 개별적으로 제작해 위 4개의 공장에 보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B-29의 생산은 더더욱 독촉받았고, 1943년부터 대대적인 생산에 돌입해, 1943년에 이미 100여 기를 미 육군항공대에 납품했고, 44년 3월에서 4월의 1달동안 150기를 추가로 생산해냈다. 이러한 B-29의 생산을 캔자스의 전투(Battle of Kansas)라 통칭한다.

B-29의 생산은 전쟁이 끝난 1946년에 종료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총 3,960기(XB-29 3기, YB-29 14기, B-29 2513기, B-29A 1119기, B-29B 311기)가 생산되었다.

성능

폭격기로서 가장 중요한 폭장량에 있어 B-29는 B-17에 비해 2,400파운드(1,200kg)가 더 많은 20,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는 대전기에 등장한 그 어느 폭격기도 범접하지 못한 규모이다. 아울러 항속거리 3,250마일(5,230km), 최대작전반경 5,600마일(9,000km)은 그 어느 나라도 상상하지 못한 것으로, 미국의 전략폭격 능력을 단숨에 배가시켜준 셈이다.

단순히 폭장능력이나 항속거리만이 우수한 것이 아니다. 최고속도는 574km/h로 처음 미군이 제기한 ROC에는 못미치지만 초대형폭격기임을 감안하면 빠른 편이다. 그리고 느려진 속도를 대신하여 최고상승고도 31,850피트(9,710m)를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전투기로는 상승조차 불가능한 고도이다. 실제 이 비행고도 문제로 일본군은 1944년에 B-29의 요격에 전혀 나설 수 없었다.

방호력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중장갑을 채택하여, 당시 독일군 전투기의 주무장 중 하나인 20mm 기관포에 대한 내탄성을 가져서 20mm 기관포탄 몇 발정도로는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의 7.7mm 기총에 대한 방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추가로, 2문의 20mm 기관포 및 10문의 12.7mm 중기관총이 방호무장으로 탑재되었는데 이중 20mm 기관포는 후기형에서 제거되었지만 12.7mm 중기관총은 중앙통제식 자동사격체계를 운용하여 사수가 효과적으로 적기들을 요격할 수 있게끔 도와주웠다.

그리고 위의 모든 성능을 구현해내기 위한 조건으로 2,200마력에 달하는 Wright R-3350-23/-51/-57 사이클론 18-실린더 레이디얼 엔진 4기를 장착했다. 이 엔진은 성능만큼은 확실했지만 워낙 무거운 기체의 비행을 책임지다보니 엔진 수명이 타 항공기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었다. 다만, 미군은 이를 대량의 예비 엔진을 공급하여 전선 정비소에서 엔진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밖에도 여압장치가 잘 되어 있어, 동시기 폭격기들과 달리 고고도 비행중에도 승무원들은 방한외투 없이 평상시 근무복만으로도 비행이 가능했다.

전과

제2차 세계대전

본격적으로 양산, 배치되는 시점은 1944년인데 이 시기 독일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데다, 영국을 기지로 한 B-17만으로도 독일 본토 폭격이 가능했기에 양산되는 모든 B-29는 아시아 태평양 전선으로 돌려졌다.

1944년 4월에는 인도 기지에 배치되어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던 태국 및 점령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각지를 산발적으로 폭격했다.(마터호른 작전) 이후 7월경부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기지에 배치되어 만주와 일본 서부 큐슈 등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으나 전과는 적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도쿄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1945년 3월부터는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하에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 공습에 나섰다. 그 유명한 도쿄대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의 주요 대도시들에 소이탄 폭격을 감행, 초토화시키고 덤으로 체스터 니미츠의 명령으로 일본 연안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해 일본을 말려죽이는데도 큰 공훈을 세웠다. B-29의 일본 전략폭격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어 일본의 도시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고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없앴다. 아울러,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도 B-29가 실시했다.

이러한 B-29의 전략폭격일본 제국의 패망에 쐐기를 박는데, 이미 산업 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을수 없는 일본제국은 그나마 눈물겹게 유지하던 산업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손실함은 물론이고, 일본 본토를 공격함에 따라 일본 국민들의 전의를 상실케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오지마 섬 점령 이후 B-29의 활동은 그야말로 사신과 같아서, 그나마 요격기를 띄우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일본 제국은 완전히 요격기를 생산할 능력마저 상실해 버렸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에서도 개전 초부터 폭격에 나서, 1950년 겨울이 되면 북한 지역에 더 이상 남아있는 산업시설이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MiG-15기들이 출현, B-29들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게 되자 B-29는 주간폭격을 중단하고 야간폭격에만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청천강 이북지역(미그앨리)에서의 폭격활동을 자제하게 된다.

  • 현재 사용자:단씨가 한국전쟁 당시 B-29의 활약에 대해서는 책(FEAF Bomber command and the Air war in Korea 1950-1953, 미 공군 박물관에서 발행.ISBN 0-16-050374-4 : 비매품)을 번역 및 요약하여, 추가준비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퇴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B-29는 제트전투기의 요격에 취약성을 보인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대부분의 전투용 군용기가 제트기로 교체되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게 되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당시부터 개발하던 B-36의 개발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보잉이 1952년에 후계기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를 개발하면서 일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1960년에 마지막 기체가 퇴역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