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Ladenijoa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19일 (금) 22:48 판

틀:넘겨주기 있음 Korean War 틀:학술 관련 정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개요

전쟁 발발과 전개

전쟁 전야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평온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만, 북한이 먼저 침공한 것과 철저하게 전면전을 계획해왔다는 점 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북측에는 소련, 남측에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서자 이미 광복 직후부터 3.8선부근에 국지적인 교전이 수도없이 발발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전쟁의 위험은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발발 배경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은 대한민국 만큼이나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계가 들어서긴 했지만 문제는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는 만큼 소련에 오래 머무르고 있었고 이에 한반도 내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활동하며 한반도 내에 기반을 쌓아둔 여러 좌익 세력들은 김일성에게 있어 최고의 우군이자 동시에 최악의 적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군정의 개입으로 점차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좌익 세력들이 하나둘 탄압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자 이들은 대거 북쪽으로 몰려들어왔고 김일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커다란 도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다. 특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은 그 쪽수도 많아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결국 김일성은 박헌영을 교묘하게 괴롭혀서 그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단 힘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명목상으로는 김일성이 먼저 한반도 이북에 자리를 잡아둔 사람이였으니 박헌영 또한 김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자 결국 가만히 있으나 도망을 치나 김일성에게 죽을 판이였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을 참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제안을 건네었다. 마침 김일성 또한 남쪽을 흡수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어 이에 동의하였고 결국 스탈린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스탈린도 막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터라 더 이상의 전쟁만큼은 피하고 싶어 처음엔 거절했으나, 철저하게 한반도 안에서 다 정리하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에 비밀리에 이를 승인하고 만다.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분탕을 침으로서 미국과 자유주의 세력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는 사이 여러 이권을 챙길 목적이였음이 후일 드러났다.

북한의 기습남침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휴전선을 넘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38선 이북에 다수의 병력을 몰빵시키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측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기강이 헤이해져 있었고, 때마침 농번기라 많은 군인들이 고향집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나가는 등 말 그대로 막장이였다.[1]

사실 당시 한국군의 전력으로는 몇명의 병력이 전선에 모여있든 북한의 초반 공세를 막는건 무리였다. 한국군의 장비는 부실했고,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는 적의 공세를 버티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은 불과 몇년전에 일본군이 몸으로 증명한 바있다. 그나마 그 시절의 일본군은 궤도라도 달린 전차가 굴러다니고, 전투기가 기총쏘며 날아다니고, 전함이 포라도 쏘는 군대였지 한국군은 그런거 없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당시의 타국 병기에 비교하면 '기술적으로 뒤쳐진'물건이라는 평가를 받는 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본군 병기들이지만, 한국군은 이것도 없었다.

육군은 개전 시점에 소수의 장갑차를 제외하면 단 한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고, 공군은 정찰기와 훈련기를 빼면 전투기/공격기/폭격기 보유량이 0이였는데다가, 해군은 그나마 전투함이라고 할만한 배를 개전 직전에야 간신히 한 척 사서 잽싸게 본토로 보내고, 참모총장이 세 척 더 사서 하와이에서 무장 세팅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다. 반면 북한군은 소련의 원조 덕분에 한국군 장성들이 보면 침이 꼴딱 넘어갈 무기로 풀세팅된 상황이였고, 이 대로는 한국군이 아무리 저항을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남한지역의 공산화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이런 사태가 터진 이유는 미국 측에서 '북한을 자극할 위험이 있고,[2] 공군같은 경우는 장비를 줘봐야 북한으로 들고 날라버리더라'라는 이유로 한국군의 장비 지원 요청을 꾸준히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이라 군인들의 월북이나 내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육군은 지휘관이라는 놈이 부하들 데리고 월북을 하고,[3] 뱅기타고 둘이나 날라버리는걸 본 미국 입장에서는 '쟤들 장비 왜줘?'라는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공군과 해군은 모금운동을 벌여서 병기를 사오는 웃지못할 판국이였고, 그나마 사온것도 훈련기인 T-6 택산과 작은 구잠함(Submarine Chaser) 4척(!)뿐이였다. 덕분에 개전 초기 한국군은 북한군의 T-34에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로 덤비고, L-4 연락기의 날개에 바주카를 달고 나가서 쏘는 암울한 상황에 직면해야했다. 그 와중에도 소소한 전과를 내긴 냈고, 해군의 경우 부산지역으로 항해해오던 상륙함을 격침하는데 성공하는 등 나름의 노력은 했지만 한국군 만의 전력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건 불가능했다.

이러한 전략적, 장비적 열세와는 별개로 개전 초 전선과 지휘부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개전 직후 1~2일동안 서울의 정부와 군 수뇌부가 정확한 전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겹치면서 한국군 지휘부는 개전 첫 이틀인 6월 26일까지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말았다. 이는 개전 직후 국방부 전황발표에서 옹진의 17연대가 해주에 진입했다는 발표를 한 것에도 기인한다. 이 발표는 국방부가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한 거짓발표가 아닌, 유사시 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에 기반, 보고는 없었지만 17연대가 작계대로 하고 있겠지?라는 낙관적 추측으로 한 발표였다.[4]

이러한 전황 파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6월 26일 오후서부터였다. 의정부, 개성 등 서울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서 국군이 패퇴 중이라는 보고가 빗발친 것이다. 아울러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은 서울 시민만이 아니라 정부까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군 지휘부는 그나마 편제를 유지하며 방어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파주 방면이 방어선을 유지해주리라 기대하고, 확보한 예비병력을 있는 족족 의정부 축선으로 투입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축차투입 축차소모라는 병크스런 결과를 내고 말았다.

결국 의정부 축선이 붕괴하면서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강 이북의 국군 세력은 모두 고립되어 저항하다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혹은 신분을 숨긴 채 해산하였다. 그나마 파주 방면의 1사단은 모든 장비를 포기하고 한강 하구를 도하하여 후퇴하는데 성공했고, 강원도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이 대승을 거두어 북한군 2사단이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하고, 7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6사단은 이후 서울 함락에 따른 전선의 균형을 위해 원주를 거쳐 충주, 제천으로 후퇴한다.

7월로 넘어가면서도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전선의 부대 중 국군이 유지하고 있던 사단편제 제대는 중장비와 차량을 모두 상실한 서부전선의 1사단, 그리고 춘천지구에서 승리하고 후퇴한 6사단뿐이었다. 1사단과 6사단은 분전하였고, 특히 6사단은 충주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동락 전투, 1950년 7월 7일) 그러나 이런 국지적인 승리로 전세를 뒤집기는 매우 어려웠다.

한편, 트루먼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참전을 결심하고 UN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한국 파병안을 통과시킨 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 파병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이 대부분 전역하고 일본에서 평화로운 점령군 생활을 만끽하는 이들이 중심이었으며, 그나마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일본에서 급히 소집하여 투입한 병력들이었다. 선발대인 스미스 특임대는 7월 5일 죽미령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 사실상 괴멸되었다. 북한군의 전차를 격파할 화력이 부족하다는 한국군의 조언을 우습게 여기다가 T-34를 막지 못해 결국 무너진 것이다.이것들이 북한군 전차들이 귀여운 치하땅인줄 알았나...

스미스 특임대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투입된 미군 본대인 제24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사단이 무너지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는 상황에 처했다. 대전지구 전투의 패배와 2사단의 붕괴는 금강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한국군 지휘부와 맥아더 원수는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투입한다.

한편, 지상전의 상황과 별개로 미 공군은 압도적인 항공력으로 북한 공군을 불과 1주일여만에 괴멸(...)시켰으며 해군 항모항공대와 공군 B-29 폭격기들이 미약한 북한의 방공망을 비웃으며 북한 영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평양이 폭격을 받기 시작했고, 북한 지상군은 미군의 맹공습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투입되는 미국 항공기들 대부분이이 후방거점을 폭격하는데 특화되는 전략폭격기들이다보니 개전 초 북한군이 받는 공습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낙동강 전선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한국사회의 지독한 레드 컴플렉스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면서 무고한 시민 여럿 때려잡았다.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관련 작품

같이 보기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

기타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5]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석

  1. 다만 휴가로 인해 인원이 많이 빠져나간 부근은 수도권이었으며 웅진반도와 동부전선의 경우 북측의 이상한 움직임에 의한 지휘관의 결정으로 휴가가 아에 없었거나 인원 대부분이 복귀한 상태였다.
  2. 미국의 우려가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은 것이, 대통령 이승만을 포함하여 군 지휘부가 허구한 날 북진통일을 외치며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라는 온갖 개드립을 시전하고 있었다.
  3.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이며 대대장이었던 둘은 국군 내 좌파에 대한 숙군이 본격화되자 1949년 5월 동부전선에서 자기들이 맡은 대대를 통채로 이끌고 월북한다. 이 둘은 전쟁기간에도 병력을 이끌고 남침에 나선다.
  4. 6월 25일의 국군 해주 진입 발표는 이후 북한과 종복세력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의 근거로 허구한 날 이용되었다. 정작 백인엽 대령과 17연대는 필사의 탈출전을 하는 중이었다.
  5.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