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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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7일 (화) 22:47 판

파일:Hyundai Logo.jpg

개요

대한민국 최대의 자동차 생산, 판매회사.

역사

1940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북아현동 일대에 있던 '아도서비스'[1]를 인수하여 운영한 것을 시초로 본다. 열성적이고 신용을 중요시하는 정주영 회장 덕택에 적자에 시달리던 정비소를 20일만에 흑자로 돌리고 빌린 돈의 절반을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정비소가 전소됐고 신설동으로 자리를 옮겨 무허가 정비를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1943년 일본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일진공작소에 다시 기업을 뺏기고 광복 후 미군에서 불하한 서울 중구 초동 토지를 사들여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리게 되면서 현대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1947년 현대토건을 만들면서 건설업에 진출, 1950년 현대자동차와 현대토건을 합쳐 현대건설주식회사가 된다.

1967년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을 초대 사장으로 하여 미국 포드와의 제휴를 통해 공식적인 역사를 쓰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68년 울산에 2만여대를 생산할 수 있는 조립공장을 만들고 포드 코티나를 생산하였다. 여기에 1969년에는 중형세단인 포드20M, 대형트럭 D시리즈와 대형버스 R시리즈 등을 출시하며 잘 나가는 듯 했으나 그 다음달 울산 대홍수로 인해 공장이 물에 잠기고, 잦은 고장으로 불만이 쌓이던 차에 택시 위주로 차량 반납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에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발판 삼아 1971년 뉴 코티나를 출시하게 되는데 이 시기 신진자동차가 도요타와의 계약 해지로 인해 코로나의 생산을 중단하게 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것도 잘 나가나 했으나 1973년 포드와의 합작투자 계획이 나가리나게 된다. 여기에 정부에서 2천달러 이하의 국민차를 개발하고 75%의 국산화율을 요구하는 자동차육성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난처한 입지에 처한 현대차는 고유모델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발에 뛰어들게 된다. 이 때 이탈리아에 자동차를 개발해주는 업체가 많다는 말에 정세영 사장이 이탈리아에 건너가 이탈디자인에게 차량의 디자인과 전반적인 설계를 맡기고, 일본 미쓰비시와는 엔진과 밋션 등의 기술제휴를 성사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1976년 국내 고유 모델인 포니를 출시하게 되었고, 마이카 시대의 개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 에콰도르, 중동, 칠레 등에 수출까지 하며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

1977년 HD1000[2]을 출시한다. 그 해 조선호텔에서는 주한미국대사와 정주영 회장이 대면을 하게 된다. 사연인 즉 정주영 회장에게 독자모델의 개발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개발만 포기하면 미국 정부에서 조립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준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좋게 생각할 리 없는 정회장은 이를 거절했고, 한동안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8년 가격경쟁력을 위해 원가 이하로 수출하던 현대차가 정부에 징징요구하여 대형차의 생산을 허가 받고 독일포드의 그라나다를 조립생산으로 판매한다.

이후 1982년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HD1000과 5톤 트럭이 단종의 길을 걷게 되나, 1983년 중형세단인 스텔라, 1985년 엑셀프레스토, 쏘나타를 출시하게 된다.

1986년 북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 시에 현지공장 착공, 1989년 완공을 하고 현대오토캐나다를 설립, 북미권을 대상으로 판매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장은 과다 수요로 인해 수익을 남기지 못하고 결국 1995년 문을 닫게 된다.

1997년 현대차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다름아닌 기아자동차의 부도 위기. 재계 8위였음에도 무리한 투자와 과잉생산 등으로 인해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정부는 사상 초유의 부도유예라는 특약을 써서 기아차 보고 알아서 살아나라고 했으나 소용이 있을 리가 없고, 결국 법정관리 신세를 지게 된다. 이런 기아차에 욕심을 낸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삼성이다. 이미 1993년에 기아차를, 1996년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려다 실패한 삼성이 다시 한번 기회를 물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때문에 초기에는 기아차 자연도태설을 주장하던 현대가 인수 희망에 뛰어들었고 대우, 삼성, 포드도 함께 인수경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첫 경쟁에서 액면가 이하로 적거나 부채를 탕감해달라고 요구하다가 모두 유찰이 되고, 2차전으로 넘어가는데 포드는 참여를 포기, 현대와 대우 삼성이 인수를 희망하나 또다시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가 또다시 빠꾸를 먹는다. 결국 3차 조건이 이루어진 1998년 현대차가 낙찰자로, 대우가 예비낙찰자로 선정되었으며 채권단은 기아차의 7조4천억 규모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약 1조 1천억에 인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야말로 거저 먹은 셈. 이후 현대차는 1999년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 생산부분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우지만, 강력한 인수를 원하던 삼성차는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2000년 현대 가문에서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 정주영의 아들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현대그룹은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대차를 중심으로 한 현대자동차그룹이 출범한다.

2001년에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철도 빅딜로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사업부를 통합해 한국철도차량을 만들고, 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하게 된다.

2002년에는 중국 북경차그룹과 합작 법인을 세워 북경현대를 만들고 중국 현지에서의 생산과 판매를 하게 된다

2005년과 2008년에는 각각 미국 앨라바마 몽고메리, 체코 노소비체에 현지 공장을 준설한다.

2009년 야망을 가지고 진출한 일본 시장에서 참패를 맛보고 결국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1999년대입수입다변화 정책이 폐지된 직후 들어온 렉서스 브랜드에 맞서면서 정주영 체제부터 이어져 내려온 과감한 추진력으로 인해 시장조사도 부족하고, 재일교포의 애국심과 일본 시장에 맞지 않는 대형차 위주로의 라인업 구축, 한류만을 믿은 광고로 인해 그야말로 처참하게 발리고 결국 철수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것을 교훈삼아 2010년 대형버스 유니버스를 출시할 때는 철저한 시장조사와 가격 정책으로 일본에 수입된 버스 86대 중에 79대를 팔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생산 차종

엑센트
아반떼
벨로스터
쏘나타
i30
i40
그랜저
아슬란
제네시스
에쿠스
투싼
싼타페
맥스크루즈
베라크루즈
스타렉스
포터
마이티
메가트럭
엑시언트
카운티
에어로타운
그린시티
슈퍼에어로시티
유니시티
유니버스

단종 차종

코티나
20M
포니
스텔라
엑셀
스쿠프
마르샤
엘란트라
라비타
아토스
티뷰론
다이너스티
클릭
트라제XG
베르나
투스카니
리베로

각주

  1. Art Service의 일본식 발음
  2. 현재의 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