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르 해전

  • Battle of Trafalgar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나폴레옹 전쟁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정면으로 맞붙었던 해전 중 하나. 1803년부터 나폴레옹은 도버 해협 연안의 불로니에서 영국의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13만명의 지상군이 집결하고, 2천여척의 수송선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 이러한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에 대응하기 위하여 영국의 해군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페인네덜란드의 주요 항구에 대하여 함대 봉쇄를 가하였다.

수송선들이 도버를 횡단하여 상륙하기 위해서는전투함대의 엄호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각 항구에 분산된 전열함들은 영국 함대의 봉쇄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였다. 1805년 3월에 비유뇌브 제독이 6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툴롱을 빠져나와 카디즈에서 스페인의 그라비나 제독의 전대와 합류한 다음 서인도 제도로 향하였다. 이러한 기동은 사전에 나폴레옹이 수립한 대계획에 의한 것으로 이는 프랑스 함대의 주력을 서인도 제도로 출동시켜 영국 함대를 그쪽으로 유인한 다음 프랑스 함대의 호위 아래 영국해협에 진출하여 본토에 상륙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서인도 해역에서 돌아와서 영국해협에 진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해협에 알박기를 하고 있던 영국 함대의 존재로 진출을 포기하고 다시 지중해로 향하던 중에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근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추격중이던 넬슨의 함대에게 걸려 전개된 해전이 바로 이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전투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전투 이전[편집 | 원본 편집]

10월 19일 오전, 비유뇌브 제독이 지휘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지중해로 진입하기 위하여 카디즈를 출항하였었다. 당시 연합함대는 프랑스 전열함 18척, 스페인 전열함 15척, 그리고 5척의 프리깃함이 함포 3천문을 보우하였었으며, 승조원은 3만명 가량이었다. 한편 이러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넬슨은 즉시 연합함대의 지중해 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출항하였다. 그가 이끄는 전력은 전열함 27척, 프리깃함 4척, 함포 2,500문을 보유하였었고, 승조원은 2만명이었다.

조우[편집 | 원본 편집]

10월 20일 비유뇌브 제독의 함대는 남서풍을 받으며 지브롤터 햐협에 접근중이었다. 즉 거의 역풍에 가까운 바람을 안고 남남동 방향으로 항진중이었다. 반대로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넬슨의 함대는 큰 속력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비유뇌브를 추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넬슨은 20~21일 야간에 적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추월해버리는 일을 막고, 적 함대가 변침할 경우 자신들이 불리한 바람을 뒤집어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추격의 속력을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이유로 21일 오전 양측 함대는 모두 트라팔가르갑 근해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투전개[편집 | 원본 편집]

비유뇌브는 영국함대가 연합함대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함대를 변침하여 북상하였다. 그런데 하필 카디즈로 귀항하려고 하였을 때 풍향이 반대방향인 서북서풍으로 바귀면서 넬슨의 함대가 뒷바람을 받게 되었다. 이 순간 넬슨의 함대는 두개의 종열진으로 프랑스-스페인의 연합함대에 거의 수직의 각도로 진행중이었으며, 넬슨은 좌측 종열진에서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선두함인 빅토리함에 승함하고 있었으며, 부사령관인 콜링우드 제독은 우측 종열진에서 15척의 함선을 이끌고 로열서버린함에 승함하고 있었으며, 두 종열진간의 간격은 약 1마일 가량이었다.

11:35가 되자 넬슨은 "영국은 여러분이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라는 유명한 신호기와 함께 "더욱 접근하여 적과 교전하라"는 신호기를 게양한 후 평소 그가 구상했던 계획에 따라 적 진형의 중앙을 향하여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넬슨이 승함중이던 빅토리함은 바로 비유뇌브가 승함중이던 기함 뷔상또르를 향해 돌진하였으며, 뷔상또르의 함미를 스치듯이 통과하면서 그 순간 그야말로 살인적인 현측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한편 콜링우드가 이끄는 우측 전대는 연합함대 후위의 선두, 스페인의 그라비나 제독의 차석 지휘관인 알라바 제독의 기함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넬슨을 뒤따르던 함선들은 연합함대 전열의 허리쯤에 위치한 다른 함선들을 공격하였으며, 콜링우드 예하의 함선들도 산개하면서 연합함대 전열의 후위에 대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돌진해 들어간 부분 앞쪽에서 진행중이던 함선들은 되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려 제 때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숫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있었고, 거기에 영국 함대가 연합함대의 중위와 후위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면서 이쪽에서는 화력의 열세로까지 이어졌었다.

전투의 종결[편집 | 원본 편집]

한참 전투가 진행되던 와중 13:30경 넬슨은 뷔상또르를 뒤따르던 리타우러블에서 발사한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러나 전투는 넬슨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이어져서 17:30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의 함선 19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으며, 프랑스 함대 지휘관인 비유뇌브 제독마저도 생포당하게 되었다. 대패한 연합함대의 나머지 함선들은 급히 카디즈로 도주하면서 전투가 종결되었다.

양측의 피해를 정산해 보면 연합함대에서는 2,6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으며7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영국 함대에서는 전열함의 손실은 없었으나 절반 정도가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1,7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넬슨 제독을 잃었다.

전투의 여파[편집 | 원본 편집]

이 해전에서 패배한 프랑스 함대는 재기불능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영국을 침공하려고 열심히 준비중이던 나폴레옹의 계획도 무산되게 되었다. 반대로 영국은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면서 장기간 추구하였던 해양패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해전 이후 프랑스에 대한 해양봉쇄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리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나 일부 국가가 이를 어기고 영국과 교류를 하면서 러시아 원정을 단행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는 나폴레옹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