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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악필이었다. 악필 때문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엥겔스가 말년에 눈이 먼 건 극악의 악필로 작성된 자본론 원고를 정리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그의 육필을 해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친구인 엥겔스와 비서 역할을 했던 아내 예니뿐이었다고 한다.
*지독한 악필이었다. 악필 때문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엥겔스가 말년에 눈이 먼 건 극악의 악필로 작성된 자본론 원고를 정리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그의 육필을 해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친구인 엥겔스와 비서 역할을 했던 아내 예니뿐이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지만, 정작 그는 소부르주아로 집안에 하녀를 두었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지만, 정작 그는 소부르주아로 집안에 하녀를 두었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유원에 따르며 이러한 것은 시대분위기를 간과한 오해라고 한다. 그리고 고용인으로서 하녀를 둔 것은 맞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은 한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워낙 충동적이고 에너지 과잉인 사람이지라 가끔 유산 등이 들어오면 하라는 저축은 안하고 부인과 자녀들과 같이 음악회를 감상하는 등 낭비를 해버리는 어리석은 면모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삶은 가난으로 얼룩진 삶이었다. 그나마 부르주아인 엥겔스가 도와줘서 전업 글쟁이로 살았던 것이다. 모든 임노동을 배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취직하는 것을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하녀(신분적 예속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가사도우미와 같다)를 고용했다는 것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주로 그의 이름을 "칼 맑스"로 표기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 [[막스 베버]]의 서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군대나 경찰에서의 레드 콤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거에는 주로 그의 이름을 "칼 맑스"로 표기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 [[막스 베버]]의 서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군대나 경찰에서의 레드 콤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5년 12월 4일 (금) 17:32 판

1875년 경의 마르크스

가장 영향력 있는 19세기 철학자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틀:날짜/출력 트리어~틀:날짜/출력 런던)는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저널리스트,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의 주역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겐 원조 빨갱이 마두(...)정도로 인식되지만, 근대 사회과학, 인문학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생애

결혼생활

1843년 유서깊은 남작 가문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과 결혼했다. 당대의 일반적인 결혼과 다르게 예니가 마르크스보다 4살이나 많았지만 그녀는 마르크스에게 푹 빠져 있었고 마르크스도 결혼 생활 내내 그녀를 사랑했다.[1] 마르크스는 아내의 신분을 곧잘 자랑스러워하곤 했는데, 예니 본인도 편지 말미 서명에 항상 폰 베스트팔렌 남작의 영애임을 적어두었다.

말년과 죽음

마르크스의 말년은 병으로 얼룩진 삶 이었다. 이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1881년 12월, 아내인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 1814~1881)가 오랜 암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예니 마르크스는 자신의 남편인 카를 마르크스에게 "카를, 나는 이제 기운이 다 됐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예니 마르크스는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으며 카를 마르크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하이게이트 묘지로 나오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얼마 있지 않아 첫째 딸인 예니(Jenny, 어머니의 이름과 같다)가 죽었다. 그리고 틀:날짜/출력, 카를 마르크스도 아내와 같은 병인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아내와 함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틀:날짜/출력 오후 2시 45분, 현대 최고의 사상가가 생각하기를 멈추었습니다. 겨우 2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데 우리들이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안락의자에서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그의 이름은, 그리고 그의 작업은 또한 수세기를 이어가며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
-틀:날짜/출력,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글표기법 문제

Karl Marx는 다양한 한글 표기법이 사용되어 왔다. 국립국어원독일어 표기법을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가 맞으나, 칼 맑스, 칼 마르크스 등의 명칭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Marx의 사전적 발음은 [marks]이고, 하나하나를 한글로 옮겨적으면 ㅁㅏㄹㅋㅅ가 된다. 현행 표기법에서는 모음 없이 자음만 이어질 경우 'ㅡ'를 붙여 적도록 하고 있으므로, 최종적으로는 '마르크스'가 되는 것이다.

사상

영향

러시아 혁명

저작

  •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 1845년,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
  •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
  • 1845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
  • 1847년, 《철학의 빈곤》(Das Elend der Philosophie) [2]
  • 1848년,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 1849년, 《임금노동과 자본》(Lohnarbeit und Kapital)
  • 1857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 1862년, 《잉여가치론》
  • 1865년,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Lohn, Preis und Profit)
  • 1867년, 《자본론》(Das Kapital)[3]
  • 1871년, 《프랑스 내전》
  • 1871년, 《고타강령비판》

트리비아

  • 지독한 악필이었다. 악필 때문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엥겔스가 말년에 눈이 먼 건 극악의 악필로 작성된 자본론 원고를 정리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그의 육필을 해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친구인 엥겔스와 비서 역할을 했던 아내 예니뿐이었다고 한다.
  •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지만, 정작 그는 소부르주아로 집안에 하녀를 두었으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유원에 따르며 이러한 것은 시대분위기를 간과한 오해라고 한다. 그리고 고용인으로서 하녀를 둔 것은 맞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은 한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워낙 충동적이고 에너지 과잉인 사람이지라 가끔 유산 등이 들어오면 하라는 저축은 안하고 부인과 자녀들과 같이 음악회를 감상하는 등 낭비를 해버리는 어리석은 면모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삶은 가난으로 얼룩진 삶이었다. 그나마 부르주아인 엥겔스가 도와줘서 전업 글쟁이로 살았던 것이다. 모든 임노동을 배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취직하는 것을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하녀(신분적 예속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가사도우미와 같다)를 고용했다는 것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 과거에는 주로 그의 이름을 "칼 맑스"로 표기하였는데, 이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 막스 베버의 서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군대나 경찰에서의 레드 콤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각주

  1. 그러나 마르크스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뒀다(!). 엥겔스가 친구의 명예를 위해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둘러댄 뒤 다른 가정에 입양시켰다.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켰는데, 그래서 마르크스의 딸들은 착하고 상냥한 엥겔스가 왜 가엾은 프레디를 보내버렸는지 의아해했다니 아이러니.
  2. 피에르 프루동의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3. 마르크스는 한 평생 자본론 쓰는 것을 짐으로 생각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처음에는 금방 쓸거라고 하더니 안써진다며 괴로워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마르크스 본인이 탈고하여 출간한 것은 1권이고 2, 3권은 그의 사후 남겨진 원고를 엥겔스가 정리하여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