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634년~638년
위치 레반트 지방[1]
결과 이슬람 제국의 승리
교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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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
테오도로스 트리시리오스
바한
토마스
우마르 이븐 알 하타브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아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샤라하빌 이븐 하사나

이슬람의 레반트 정복은 7세기 초반 레반트 지방에서 일어난 이슬람의 지하드를 말한다. 원래 레반트를 지배하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과 아라비아 지방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 강자 세력인 이슬람 제국의 첫 충돌은 632년 무타에서의 전투이지만, 제대로 된 전쟁의 시작은 634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난 이후였다.

전쟁 이전의 상황

비잔티움 제국 치하의 레반트

오늘날의 레반트 지방이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것은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것을 기점으로 하였고, 이후 3세기부터 7세기에 서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막는 (동)로마 제국의 최전선이 되어왔다. 70년에 예루샬렘을 함락시키고 유대 왕국을 멸망시킨 로마 제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북부를 팔라이스티나(Palaestina) 총독부를 설치해 다스렸고, 이후 디오체세(Diocese) I/II 총독부로 양분한다. 한편 이스라엘 남부, 시나이 반도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서부 해안을 묶어 팔라이스티나 살루토리스(Palaestina Salutoris) 총독부로 묶어 이 지방은 로마의 아랍계 속국인 가산 왕국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603년의 비잔틴-사산 전쟁 말기에는 사산 왕조의 왕 호르소 1세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점령해 628년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를 내쫓을 때까지 통치하였다. 이후 이슬람 제국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비잔틴 제국은 이 지역에 행정을 재구축하는데 힘써왔다. 이 시기의 레반트 지방은 정치적으로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한 지역은 북쪽으로는 안티오키아와 알레포, 남쪽으로는 사해에 이르는 지방으로 시리아라 불렀으며, 사해 이서, 이남 지방은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분류되었다.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그리스화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부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지킨채 살아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고 있었으며 극소수만이 유대교와 아랍 전통 신앙을 믿고 있었다. 레반트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로마 치하에서 왕도 두고, 반(半)독립국으로 활동하고 있던 가산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예멘에서 레반트 지방으로 이주해온 아랍계 부족들이었다.

레반트 지방에서 페르시아를 쫓아낸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국경선을 가자 지방에서 사해 남부에 이르는 선으로 후퇴시키고 수비를 페르시아와 접경하는 레반트 북쪽으로 집중시킨다. 이 때문에 이슬람군은 가자에 이르러서야 비잔틴 정규군과 맞부딛히게 된다.

이슬람 제국의 기상

632년 7월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그를 이어서 아부 바크르가 이슬람 세력의 지도자가 된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여러 아랍인 부족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진압한 아부 바크르는 명실상부한 이슬람계의 지도자가 된다. 그가 의도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힘을 외부의 제국을 향해 뻗기 시작한다. 먼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페르시아로 보내 공격을 시작한 그는 이슬람 제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들 중 하나로 만드는 도미노의 처음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레반트로의 진격

페르시아를 공격해 이라크를 탈취한 할리드는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사산 왕조와 이슬람군이 맞붙고 있는 동안 이슬람군은 가산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가산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초기에 반란에 참여했던 부족들을 제외한[2] 모든 부족들로부터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군대가 모이자 아부 바크르는 군대를 4개로 쪼개 장군과 목표를 할당한다.

  •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엘랏을 거쳐 팔레스타인을 목표로
  • 야지드 이븐 아부 수피안은 타부크를 거쳐 다마스쿠스를 목표로
  • 슈라빌 빈 하사나는 야지드를 따라서 타부크로 간 뒤 요르단 강을 목표로
  •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는 슈라빌을 따라서 타부크를 거친 뒤 홈스를 목표로

비잔틴 군의 배치 등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아부 바크르는 혹시나 떨어져 각개격파 당할 것을 우려해 서로 간의 접촉을 끊지 않고 진격할 것을 명령한다. 만일 이슬람군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될 때를 대비해 아부 우바이다가 총대장으로 임명된다. 634년 4월 초, 야지드의 군대가 메디나를 떠남으로써 이슬람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슈라빌,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 순으로 시리아를 향하기 시작한다. 아부 바크르는 부대장 옆을 짧은 거리 동안 동행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대가 가는 길은 그대나 그대의 군대 누구에게도 힘든 일이 아니다. 군인들과 장교를 절대로 혹사시키지 말고 모든 문제에 대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항상 정의롭게 행동하며 모든 악과 압제는 물리쳐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나라는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패배하기 때문이다. 적이더라도 무시하지 말아야한다. 전투 중이거나 군대를 재정비 중인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자는 알라의 진노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진노를 산 잔들의 거처는 지옥이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적을 이겼더라도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들은 죽이지 말아야 하며, 고기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가축을 도살해서는 안된다. 약속을 했으면 어겨서는 안된다. 수도원에서 은둔하여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자들을 만나게 될텐데 이들은 내버려 두고 수도원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또한 머리의 중앙을 잘라 두피를 노출시킨 사탄의 하수인들과 십자가의 숭배자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칼로서 물리치고 이슬람교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지즈야를 바칠 것인가를 강요해야 한다. 그대에게 알라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아부 바크르 시기의 레반트 정복

초기의 시련

야지드의 부대는 타부크를 지난 뒤 소규모 아랍 군대와 충돌을 겪는다. 엘랏에 도착한 아므르의 군대와 사해 남쪽 아라바 계곡에 도착한 야지드의 군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비잔틴 군대와 만나 패배하고 만다. 한편 아부 우바이다와 슈라빌의 군대는 계속해서 진격해 보스라와 자비야의 중간 쯤되는 지점에 도착한다. 동맹을 맺은 아랍인 부족으로부터 이슬람군의 침략 소식을 들은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곧 그들의 공격을 대비할 계획을 세운다. 헤라클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곳곳에 퍼져있던 비잔틴 수비군들은 아이즈나딘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아이즈나딘에 모인 비잔틴군은 이슬람군(특히 아므르의 군대)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비잔틴의 군대는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부 우바이다는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탓에 아부 바크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아부 바크르는 이라크에 있던 할리드 이븐 왈리드를 레반트로 보낸다.

634년 6월 이라크의 알 히라에서 출발한 할리드는 8000명의 강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가는 루트는 다우마트 울 잔달을 거쳐서 가는 루트와 라카를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빠지는 루트가 있었는데, 이 두 루트에는 큰 단점이 있었다. 다우마트를 거쳐서 갈 경우 시간에 오래 걸리고, 라카를 거치는 경우 비잔틴군과 맞부딛힐 위험성이 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할리드는 이 두 루트를 모두 버리고 이라크에서 사막을 뚫고 시리아로 가는 직행 루트를 택해 진격한다.

레반토 남부 정복

시리아에 도착해서 사와, 아라크, 타드무르[3]를 차례로 점령한 할리드 군은 카라틴과 후와린에서 비잔틴군과 만나 전투를 치뤄서 승리한다. 이후 다마스쿠스를 향해 산맥을 넘고난 뒤 갑자기 방향을 가산 왕국의 수도인 보스라로 바꾼다. 여전히 레반트와 아라비아의 국경에 머물러 있는 다른 이슬람군 지휘관에게 보스라로 모일 것을 명령한 할리드는 마르즈 알 라히트에서 가산 왕국의 군대를 무찌른다. 그러나 아부 우바이다의 명령을 따라 보스라에 제일 먼저 도착한 슈라빌의 군대는 보스라의 수비군과 싸워 포위되고 만다. 다행히도 할리드의 군대가 와 그 포위를 풀어줬고, 이후 할리드, 슈라빌, 아부 우바이다의 군대가 모두 모여 보스라를 공격해 634년 7월에 함락시킨다.

보스라에서 아부 우바이다는 아부 바크르의 명령에 따라 할리드에게 이슬람군 총대장의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나 막대한 수의 비잔틴 군이 이슬람군을 몰아내기 위해 모이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군대의 수가 9만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634년 7월 비잔틴군과 이슬람군이 아이즈나이딘에서 부딛혔고, 이 전투는 이슬람군의 승리로 끝났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가 레반트 내의 비잔틴 세력이 멸망하게 되는 계기로 보고 있다. 아이즈나이딘에서 비잔틴군을 무찌른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한다. 다마스쿠스는 헤라클리우스의 사위인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다. 다마스쿠스를 지키기 위해 토마스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먼저 에메사에 있던 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다마스쿠스로의 진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두 부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이 두 부대는 각각 야쿠사와 마라즈 아스 사페르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하였으나 공성전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은 성공한다 8월 20일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한 할리드는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모든 물자와 사람을 수송할 수 있는 길이란 길을 막아놨고, 이 때문에 헤라클리우스가 보낸 비잔틴군은 발이 묶이고 만다. 결국 다마스쿠스는 함락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슬람군과 평화협상을 맺는다. 그러나 이 평화는 3일만에 깨지고 만다.

한편 다마스쿠스 공성전이 진행되는 동안 제 1대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우마르가 집권한다. 우마르는 기존의 총대장이었던 할리드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아부 우바이다를 임명한다.

우마르 시기의 레반트 정복

할리드의 해임

그러나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다마스쿠스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가 공성전이 끝나자 할리드에게 해임 소식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할리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부 바크르가 죽고 우마르가 새 칼리프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 말을 듣고 복종해야지

할리드보다 신중파였던 아부 우바이다가 새로운 총대장이 되었으므로, 이후의 이슬람군은 전보다 더 느리고 침착해진다. 할리드를 크게 존경했던 아부 우바이다는 그를 기병대장에 임명해 군대에 남겨두고 이후 그의 조언에 크게 기대어 전쟁을 치룬다.

레반트 중부의 정복

아부 우바이다가 이슬람군의 총대장이 된 이후, 그는 소규모 부대를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48km떨어진 자흘레로 보낸다. 자흘레에 도착한 부대는 그 곳의 비잔틴 수비군과 만나 전투를 치뤄 패배했지만, 이후 비잔틴 수비군 또한 할리드의 기마대를 만나 패배하고 만다. 이로써 레반트 중앙을 완전히 정복한 이슬람군은

각주

  1. 오늘날의 시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요르단, 터키 남서부
  2. 이후 이들은 아부 바크르 이후의 칼리프 우마르가 인력이 딸려 그들에게 손을 대기 전까지는 정복전쟁에서 배제된다.
  3. wikipedia:ko:팔미라라고도 불리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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