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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그리스]]의 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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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최대 도시이다.
그리스에서 최대 도시이다.



2016년 8월 15일 (월) 22:56 판

현대 그리스의 수도

01 thumb.jpg 그리스에서 최대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는 도리아인들의 남하에 이주한 선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신화에 의하면 영웅 테세우스가 사람들을 모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르콘(Archon)[1]과 아레오파구스(Arefpagus)[2]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두 조직모두 귀족을 중심적 기구였기고 평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평민들의 불만이 확대되자 아르콘으로 선출된 드라콘(B.C. 621)은 이들의 불만에 대해 억제해야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즉 중벌주의를 채택해 평민들의 어떠한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특히 빚이 많아서 못 갚으면 노예가 되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였다.고대판 신체포기각서 이는 평민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그 수위는 높아져만 갔다.

평민들의 높은 불만은 솔론에 의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신임 아르콘인 솔론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먼저 솔론은 평민들을 위해 부채를 말소시키고, 부채노예들을 해방했으며, 부채로 인한 인신예속을 금지했다. 또한 솔론은 민회에 최하층도 참여시키고, 시민법정을 만들었으며, 부족마다 100명씩 추천하여 400인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평민들의 경제적 요구사항과 정치적 요구사항을 만족시켜주었다. 하지만 평민들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것은 기존 귀족층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솔론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치참여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신설하였다.[3] 솔론의 개혁은 평민과 귀족들의 불만을 해소하면서 서로를 만족시켰고, 이에 그는 조정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솔론에 의해 수립된 아테네의 정치체제인 금권정치제는 메가라 전쟁을 통해서 크게 변화되게 된다. 메가라 지역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평원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는 지역에 있었다. 아테네는 이곳을 장악하여 그 지역의 평원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려는 발판을 만들려고 하였다. 메가라 전쟁은 기존의 전쟁과 다르게 흘러갔다. 과거 전쟁이 귀족 중심의 기사들에 이루어졌다면, 메가라 전쟁은 평민 중심의 중장보병이 핵심적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메가라 전쟁과정에서 평민층이 급성장하였고, 이는 귀족층과의 평민층 간의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그리스판 나폴레옹 페이시스트라토스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라 전쟁 중에 큰 업적을 남긴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평민층의 지지를 받아 종신아르콘에 취임하였다.(B.C.561) 그는 참주가 된 것이다.[4]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층의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정권획득과정에서 얻게 된 토지를 빈농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고, 상공업자들의 권한과 특권을 많이 부여하여 상공업을 장려시키려 하였다.[5]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층의 힘을 강화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동시에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사후 그의 두 아들인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가 참주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무능했다. 결국 이들의 정책은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서 불만을 야기했고 귀족파와 평민파가 힘을 합쳐 이 둘을 쫓아내어 참주정을 종식시켰다.

참주제를 종식시킨 이후 평민파와 귀족파는 이후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분쟁을 거듭했다. 기존의 솔론식 제도[6]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고, 평민파는 솔론식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 두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와중 등장한 인물이 클레이스테네스이다.

귀족 명문가 출신인 클레이스테네스는 평민파와 귀족파 간의 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평민파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귀족파에 비해 군세가 부족한 그는 스파르타의 군세를 빌려 귀족파를 분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확보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그는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을 지역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이는 귀족들의 세력약화를 유도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권한이 부족 내 지위에서 결정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지역적 편제로 전환시켜 부족이라는 개념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 제도를 만들면서 발생하게 된 군사지휘권 문제[7]를 해결하기 위해서 10인의 군사지도자(스트라테고스;Strategos)를 선출하여 이들에게 군대지휘권을 부여하였다.

두 번째로 구민 모두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솔론식 제도에서 정치참여의 제한을 철폐하고 구민이고 20세 이상 성인남성이라면 모두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세 번째는 500인회를 설립하였다. 500인회는 솔론의 400인회와는 달리 재정, 전쟁, 외교 등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과거 아레오파구스 회의가 지니고 있던 권한의 대부분이 500인회로 넘어왔다.

네 번째로 시민법정의 권한을 강화시켜 시민법정이 모든 사법적 재판을 결정했다.

이러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아르콘과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동시에 귀족들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같은 참주가 또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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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집정관으로 군사담당, 종교담당, 민사담당 총 3인이었으나 나중에 9인으로 늘어났다.
  2. 귀족회의로 대부분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했다.
  3. 이것 때문에 금권정치라 불렸으며, 과거 6차 교육과정에서 솔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 아르콘은 과거 종신제였지만 시간이 흘러 1년 임기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종신아르콘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세에서도 귀족은 토지, 즉 장원을 보유한 사람을 칭했다. 그렇기에 상공업을 장려한다는 것은 비귀족세력을 키우겠다는 의미이다.
  6. 재산에 따른 정치참여에 차등
  7. 과거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에서는 부족장이 행정구역의 대표자임과 동시에 군지휘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