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페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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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덴제의 베켄바우어(Beckenbauer vom Bodensee)

오스트리아 축구 대표팀 최후의 황금기를 지탱했던 월드클래스 수비수. 한국인들에게는 차범근의 베스트 프렌드로 잘 알려져 있다.

클럽 경력

SSW 인스브루크(1974-1978)

고향 라우테라흐의 클럽에서 FC포어아를베르크로 이적해 바로 주전을 차지했다. 그러나 팀은 강등당했고 여러 클럽들의 관심 속에 바커 인스브루크로 이적한다. 꼴찌에서 준우승팀으로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을 꿰찼고, 첫 시즌부터 리그-컵 더블을 달성했다.[1] 이듬해에는 리그-컵에서 준우승을 했고, 3번째 시즌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을 챙기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수비수로 주목받고 있었고, 1978 FIFA 월드컵을 3주 앞두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을 체결했다.

프랑크푸르트(1978-1983)

월드컵에서의 활약 때문에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시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본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중 백미는 1979/80시즌의 UEFA컵 우승인데 전반기에 부상으로 리그 6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후반기에 복귀해 물오른 기량을 과시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 연속으로 발롱도르에 이름을 올렸는데 수비수인 걸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다.[2] 하지만 1983년에 구단의 재정 문제로 이적하게 됐고, 그 행선지는 북부의 브레멘이었다.[3]

브레멘(1983-1987)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부터 제의가 왔지만 거부하고 브레멘으로 이적했는데, '스포츠적인 관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브레멘에서도 리그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으며, 연거푸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1985/86시즌이었는데 미하엘 쿠투초프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놓치지만 않았어도 우승할 수 있었다.[4] 어느덧 페차이도 서른이 넘었고,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로 한다. 페차이에겐 유감스럽게도 1987/88시즌에 베르더 브레멘은 마침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FC 스와로브스키 티롤(1987-1990)

페차이가 오스트리아에서 몸담았던 SSW 인스브루크는 1986년에 바커 인스브루크와 스와로브스키 티롤로 나뉘었고, 페차이는 티롤로 향했다. 마침 1987년에 전설적인 명장 에른스트 하펠이 감독으로 부임해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들이 감독과 선수로 만나기도 했다.[5] 1990년 1월에 혈행장애로 졸도한 일이 있었고, 의사로부터 심장에 문제는 있지만 스포츠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에 은퇴했다.

국가대표 경력

스물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A매치 최다 출장 공동 3위로 은퇴했으며 지금도 공동 5위다. 1978 월드컵1982 월드컵에 참여했는데 특히 오스트리아가 돌풍을 일으켰던 1978년의 활약으로 유명하다.[6] 1982년에도 주전으로 뛰며 8강에 올랐으며, 북아일랜드전에서 골을 넣기도 했다.[7] UEFA 유로에는 4번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오스트리아는 페차이 사후에 개최국 자격으로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감독 경력

은퇴 이후 1991년부터 U-21 수석코치를 맡았고, 1993년에 국가대표팀 동료 헤어베르트 프로하스카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되었다.[8] 그러나 1995년을 하루 앞두고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다.

우승 경력

선수

SSW 인스브루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베르더 브레멘

FC 스와로브스키 티롤

수상 경력

선수

통산 기록

시즌 클럽 리그 대륙 총계 비고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1973-74 FC 포어아를베르크 28 3 ? 0 - - ? 3 오스트리아
1974-75 SSW 인스브루크 28 2 ? 0 1 0 ? 2 오스트리아
1975-76 SSW 인스브루크 35 7 ? 1 2 0 ? 8 오스트리아
1976-77 SSW 인스브루크 34 4 ? 2 4 1 ? 7 오스트리아
1977-78 SSW 인스브루크 32 5 ? 1 6 0 ? 6 오스트리아
1978-79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2 4 5 2 - - 37 6 분데스
1979-8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4 3 2 1 12 2 28 6 분데스
1980-8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1 10 7 2 5 1 43 13 분데스
1981-8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0 4 2 1 6 2 38 7 분데스
1982-8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4 6 1 0 - - 35 6 분데스
1983-84 베르더 브레멘 33 5 3 0 4 1 40 6 분데스
1984-85 베르더 브레멘 33 6 4 2 2 0 39 8 분데스
1985-86 베르더 브레멘 33 6 3 0 2 1 38 7 분데스
1986-87 베르더 브레멘 15 1 0 0 0 0 15 1 분데스
1987-88 FC 스와로브스키 티롤 26 3 ? 0 2 1 ? 4 오스트리아
1988-89 FC 스와로브스키 티롤 34 3 6 1 - - 40 4 오스트리아
1989-90 FC 스와로브스키 티롤 26 0 3 1 4 0 33 1 오스트리아
종합 오스트리아 243 27 ? 6 19 2 ? 35
종합 독일 255 45 27 8 31 7 313 60

각주

  1. 이 1974/75시즌이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이전까지는 나치오날리가라고 불렸다.
  2. 물론 페차이가 단순한 센터백이 아니라 리베로이긴 했다.
  3. 차범근도 이때 같은 이유로 이적했다.
  4. 쿠투초프의 커리어 PK 성공률은 90%가 넘는다.
  5. 페차이가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기는 하지만, '하펠 이후 최고'라는 말도 있다.
  6. 20년 만의 월드컵 복귀였고 브라질, 스페인, 스웨덴과 같은 조였기에 예선 탈락이 점쳐졌으나 조 1위로 통과했고, 8강 조별리그에서도 코르도바의 기적으로 불리는 승리를 일궈내 찬사를 받았다.
  7. 하지만 4년 전과는 달리 이 대회에선 히혼의 수치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었다.
  8. 당대 오스트리아 축구팬들의 우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