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차범근
車範根, Cha Bum-kun
Cha Bum-Kun in 2009.jpg
인물 정보
출생 1953년 5월 22일 (70세)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
국적 대한민국
학력 고려대학교
직업 축구선수, 축구감독
종교 개신교
신체 179cm[1], 78kg
배우자 오은미
가족 장녀 차하나, 장남 차두리, 차남 차세찌, 며느리 한채아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공격수
소속팀 고려대학교 (1972~1975)
한국신탁은행 (1976)
공군 축구단 (1976~1979)
SV 다름슈타트 98 (1978~1979)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4~1989)
지도 울산 현대 축구단 (1991~1994)
대한민국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2]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선수

갈색 폭격기

Cha Bum

클럽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분데스리가 진출 이전(-1979)[편집 | 원본 편집]

고려대학교 졸업 후 장학금을 지원해준 한국신탁은행에서 뛰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했고, 그 과정에서 민병대 감독을 따라 자동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큰 논란이 일어난다.[3] 차범근은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해서 해체된 것이니 자신이 무소속이라는 것이고, 서울신탁은행 측에서는 해체가 아니라 통합이니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다보니 서울신탁은행이 쉽게 양보할 리도 없었고 차범근을 자팀 선수로 등록하면서 강경하게 나왔다. 이 문제로 차범근은 무적(無籍) 선수가 되었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시키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소속으로 등록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선수등록 규정 때문에 이적을 강행할 경우 2년간 출장정지를 당해야 했고 거기에 축구계 일각에서는 차범근이 돈 때문에 신의를 저버렸다고 비난하여 사면초가에 몰린다. 최후의 수단으로 차범근은 이적시켜주지 않으면 입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입대와 함께 사태는 일단락된다. 처음에는 육군으로 입대한다고 기사가 나왔으나 실제로는 공군의 스카웃을 받아 1976년 10월에 공군에 입대했다.[4]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공군은 복무기간이 긴 편이었다. 그러나 참모총장 직권으로 타군과 동일한 기간으로 복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공군으로 입대하게 된다.

공군 축구단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쳐 단숨에 공군을 강팀으로 만들었고, 제대 후 포철에서 뛰기로 일찌감치 계약을 맺어 포철로부터 돈도 받았다. 이후 현대가 차범근을 중심으로 최초의 프로팀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포철에게 차범근의 급료를 돌려주겠다면서 차범근 영입에 나선다. 그러나 1978년 박스컵 때문에 방한했던 프랑크푸르트의 수석코치 디터 슐테가 서독행을 권하여, 차범근은 서독행을 결심하게 된다.[5] 차범근은 복무를 마쳤다고 생각하여 서독으로 건너가 입단테스트를 받았고, 결국 1978년 12월 분데스리가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데뷔전까지 뛰게 된다. 그러나 공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귀국한 다음 5월에 제대한 뒤 6월이 되어서야 서독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6] 그러나 서독 복귀 뒤에도 순탄치 않았는데, 업무만 잠깐 보고 오겠다고 귀국해놓고 반년 만에 돌아왔다는 이유로 다름슈타트가 계약위반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차범근은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다름슈타트 소속이라는 유권해석을 받았고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국내에서의 공식경기 출장이 금지된 상태였다.

프랑크푸르트(1979-1983)[편집 | 원본 편집]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여 1979/80시즌부터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선수생활을 시작한다.[7] 온라인상으로 떠도는 정체불명의 영상처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시 서독 축구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건 사실이었다. 1977년일본오쿠데라 야스히코쾰른으로 이적해 유러피언컵 4강에서 골도 넣었었지만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때까지 흑인 선수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축구변방인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황인 선수가 정상급 플레이를 선보이니, 당연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980-01-07kicker.jpg

키커 1980년 2호. 다들 표지모델이란 것만 주목하지만, 독일어를 읽어보면 차범근이 랑리스테에서 월드클래스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라이벌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키커는 1979/80시즌 전반기 평가에서 키건이 아니라 차범근을 외국인 전체 1위로 선정했다.[8][9]

Kicker rangliste 1979 W.jpg

본문을 읽어보면 차범근의 활약이 대단하여 국가대표팀 활약이 없지만 예외적으로 WK를 줬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차범근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리그에서만 17골을 기록한 1985/86시즌을 생각하지만, 당시의 평가를 봤을 때는 오히려 데뷔시즌인 1979/80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다.[10] 당연히 키커 시즌 베스트11에도 선정됐으며,[11] 프랑크푸르트는 9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2]

그러나 이런 임팩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키커는 1979/80시즌 후반기 평가에서 '전반기만큼 위력적이지 않았으며, 수비수들이 차범근을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라고 평했으며,[13] 2번째 시즌에는 허리부상을 당하여 1개월 간 결장하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14] 그래도 DFB-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고 우승을 차지하는 등 꾸준히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 임팩트가 떨어진 게 탈아시아급인 게 함정[15] 1982/83시즌에는 본인의 리그 최다득점이던 15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재정문제로 이적해야 했고, 결국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레버쿠젠으로 떠나게 된다.[16][17] 이적료는 차범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130만 마르크이며, 독일의 트랜스퍼마르크트는 100만 마르크로 기재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때 차범근 뿐만 아니라 브루노 페차이도 잃으면서 강등권으로 추락하는데, 훗날 카를-하인츠 쾨벨은 팀에서 가장 중요한 2명의 선수를 잃었다고 회고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비록 4시즌밖에 뛰지 않았지만 클럽의 전성기[18]에 뛰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현지 팬들에게 회자되는 선수이며, 2013년 구단에서 팬투표로 선정한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어 초청받기도 했다.[19] 이때 감동한 차범근이 SNS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차남 차두리프랑크푸르트 소속일 때, 11FREUNDE라는 언론에서 아버지&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사진을 겹쳐서 표지로 쓰기도 했다.

레버쿠젠(1983-1989)[편집 | 원본 편집]

새 소속팀 레버쿠젠은 이제 막 분데스리가에서 4시즌을 보낸, 전형적인 중하위권 팀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명문 뉘른베르크를 마다하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건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 때문인데, 아시아인을 잘 알고 있으니 상대하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20][21] 두 팀의 운명은 여기서 갈렸는데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뉘른베르크는 최하위로 강등당한 뒤 지금까지도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며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22]

첫시즌인 1983/84시즌은 팀 역대 최고의 성적인 7위로 마쳤으나 1984/85시즌에는 팀이 혼란을 겪으며 원래자리(?)인 13위로 떨어졌고, 차범근도 팀 사정상 여러 포메이션의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다가 부진에 빠졌다. 그러나 이를 뒤로 하고 1985/86시즌에는 공격수로만 나와 본인의 커리어 최다득점인 리그 17골을 기록하면서 레버쿠젠에게 최초의 UEFA컵 티켓을 선사한다.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국내 시절에는 호주에 가로막혀 좌절했었던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물론 결과는 1무 2패로 조 최하위 탈락.

월드컵의 상심이 컸던 건지 아니면 신체적 한계가 온 것인지 1986/87시즌에는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1987/88시즌에는 무릎과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했다. 차범근의 3번째 우승이자 2번째 UEFA컵 우승이 1987/88시즌에 있어서 팀의 주포로 활약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노쇠가 드러나던 시점이었고 포지션도 후반기부터 미드필더로 출전했었다. 이후 1988/89시즌 역시 미드필더로 뛰다가 축구화를 완전히 벗었다.[23] 분데스리가 최종 기록은 308경기 98득점으로 말년의 목표였던 100득점에는 끝내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외국인 최다출장 2위이자 최다득점자였다.[24]

차범근이 레버쿠젠에 미친 영향은 굉장히 큰데 2부리그에서 올라온지 얼마 안 된 구단이 영입한 빅네임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팀의 기대에 부응하여 성공적으로 클럽을 정착시켰으며, 헤어베르트 바스 등과 함께 클럽의 간판스타로 뛰었다. 실제로 클럽 홈페이지에도 차범근과 바스가 80년대 클럽의 주축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쉽게 말해 지금의 레버쿠젠을 만든 창업공신인 셈. 2004년 팬투표로 선정한 클럽 역대 베스트11에는 못 들었지만 공격수 3위를 기록해 벤치멤버에 포함되어 있다.[25]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 이라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출장기록을 세웠으며[26]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기 전까지 대표팀의 간판선수로 활약했다. 거의 노예 수준으로 뛰었는데 국내선수 최초로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A매치를 129경기나 소화했다. 그 기간이 1972년부터 1978년이니 즉 7년 만에 저렇게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는 소리다.[27] 베테랑 이회택과 박이천 때문에 처음에는 라이트윙[28]으로 뛰었으나 이들이 은퇴한 뒤에는 대표팀의 주포로 자리잡았고, 국내언론으로부터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렸다.

A매치 승률이 70%를 넘길 정도로 아시아를 폭격했고 우리나라의 박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 등을 휩쓸어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으며 특히 1976년 박스컵에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기록한 7분 해트트릭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29] 그러나 아쉽게도 월드컵, 아시안컵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최연소 국가대표로 출장했던 1972 아시안컵은 결승전에서 이란에게 연장끝에 패배했고, 1974 월드컵때는 호주와의 최종예선에서 재경기끝에 탈락. 1976 아시안컵은 지역예선에서 광탈했고, 1978 월드컵도 이란에게 밀려 예선 2위로 결국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국내에서 남긴 마지막 업적은 1978년 아시안게임 우승이었는데, 차범근이 독일로 가고 싶어하는 걸 한 당국에서는 이것까지만 뛰고 가라고 했고, 북한과 비기며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복무기간 문제로 다시 귀국하기도 했으나 결국 독일진출에 성공한 뒤로는 국가대표팀에서 뛰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1986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짓자 차범근을 국가대표팀으로 소집하게 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찬반여론이 치열했던 게 유머 웃기는 소리 같지만 당시에는 진지했다. 1978년 아시안게임 결승을 끝으로 차범근은 단 1경기의 국가대표 경기도 출전하지 않았는데 최순호, 김종부, 김주성 등 후배들의 활약으로 32년 만의 월드컵 티켓을 따낸 상황에서 차범근을 불렀다간 팀 케미스트리에 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30] 그러나 1985년 말에 차범근이 물오른 기량을 선보였고 대표팀의 평가전 결과가 썩 좋지 않자 결국 차범근을 발탁하고, 아예 서독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차범근이 합류하고 전지훈련 결과가 좋으니까 8강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설레발이 나왔는데 애초에 우리나라가 속해 있던 A조가 굉장히 힘든 조였고, 처음 국내 여론도 '16강 힘들겠다'였다. 차범근의 가세가 자신감을 주긴 했지만 현실적인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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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커 1986월드컵 특별호에 실린 A조 전력분석. 차범근이 한국의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래놓고 다른 선수들도 소개해줬다.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선수들은 긴장해서 얼어붙었고 전술의 수준은 비교도 안 될 수준이었다. 당시 차범근은 최순호와 투톱을 이루면서 오른쪽 측면의 공격을 떠맡다시피 했는데 클래스 있는 모습은 보여줬으나 혼자 힘으로 팀을 이기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그리고 마지막 태극마크는 그렇게 아쉬움만 남기고 끝났다.

감독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울산(1991-1994)[편집 | 원본 편집]

차범근은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코치 자격을 취득했는데 이때의 지식과 경험을 살려 독일식 축구를 보급한다. 차범근 축구교실을 운영하다 프로감독이 되어 하위권이던 울산을 준우승팀으로 만들지만 이후 우승에 실패하면서 결국 경질되었다. 예전 일이기도 하고 감독으로서의 차범근에 대한 기억은 거의 대표팀 아니면 수원 시절이기 때문에 울산 감독이었던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최강희와의 대립으로 최강희가 은퇴한 사건.

대한민국(1997-1998)[편집 | 원본 편집]

1996년 아시안컵에서 이란에게 2-6이라는 굴욕적인 대패를 겪으며 박종환 감독이 경질당하고 그 후임자로 차범근이 뽑혔다.[31] 차범근은 대표팀을 추스르고 독일식 3-5-2를 채택하여 월드컵 예선에서 승승장구한다. 역대 월드컵 중 우리나라가 최종예선을 가장 수월하게 통과한 게 바로 이 1998 월드컵이었다. 그 유명한 '도쿄대첩'도 바로 이때의 일. 어찌나 자신감이 충천했던지 국내언론들은 월드컵 본선에서 최초의 1승을 넘어 16강을 목표로 하자고 설레발을 칠 정도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같은 조였던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를 집중 조명했다. 사실 월드컵 직전에는 늘 설레발로 가득했다

그러나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FIFA가 백태클 퇴출을 선언하며 앞으로 백태클은 퇴장 대상이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첫경기부터 하석주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며 가힌샤 클럽에 가입해버렸다. 11 대 11로 싸워도 힘들 판에 퇴장까지 당했으니 당연하게도 무기력하게 역전패했고 언론에서는 당시 대표팀 최고의 스타였던 최용수의 결장을 두고 차범근의 리더십에 대한 비난이 등장했다. 엄청난 부담감과 함께 네덜란드를 상대로 차범근은 윙과 윙백을 동시에 사용하는 엽기적인 3-5-2로 맞섰다. 당연한 얘기지만 3-5-2는 윙 또는 윙백을 측면에 배치하고 중앙에 3명의 미드필더를 조합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차범근은 중원에 김도근 한 명만 배치하고 윙인 서정원과 이상윤으로 네덜란드의 측면을 노렸다. 여기에 시대에 뒤처지던 전담마크에 의존한 수비를 시도했으니 박살나는 게 당연했다.[32] 0:5라는 굴욕적인 패배와 함께 차범근은 단숨에 역적이 되었고, 결국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들 대회 도중에 감독을 경질하는 건 도가 지나쳤고, 실제로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의 실력이 부족했던 거지 경질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하지만 멕시코는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 16강을 깔고 들어가는 팀이고 벨기에도 과거만은 못하다지만 꾸준히 월드컵에서 호성적을 기록하던 팀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비록 월드컵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자국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꼽히는, 그 거스 히딩크의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차범근은 치욕스럽게 야인이 되었다.[33]

선전 핑안(1998-1999)[편집 | 원본 편집]

월드컵 직후 중국의 선전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프로클럽 감독으로 새 출발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큰 논란이 생겼는데 중국으로 떠나기 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축구협회를 비난하고 K리그 승부조작설을 제기하여 축구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결국 축구협회의 자체 징계로 인해 차범근은 5년간 국내에서 지도자 자격을 정지당한다.[34] 이와 별개로 중국에서의 감독생활은 썩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구단 운영진과 마찰을 빚으며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여 팀을 떠나게 된다.

수원(2004-2010)[편집 | 원본 편집]

오랜 시간 한국 축구계를 떠나있던 차범근은 2004년 K리그의 수원을 통해 현직에 복귀하게 된다. 정확히는 2003년 10월에 계약을 발표하였으며 수석코치로 독일인 마르코 페차이우올리를 선임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35] 감독은 그 유명한 차범근이고 클럽은 돈 많기로 유명한 수원이었으니 뭘하든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K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감독이었다. 첫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꼬박꼬박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나 매년 지도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결국 2010년에 사임하면서 감독 생활을 마무리한다.

논란[편집 | 원본 편집]

선수로서의 위상[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축구계 최고의 떡밥

차범근이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라는 건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라서 큰 논쟁거리가 안 되지만 문제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레전드들과 비교할 때다.[36] 빠가 까를 만든다까가 빠를 만든다의 무한루프로 수많은 커뮤니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왔으며 덕분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선수로 여기며 루이스 피구안드리 셰브첸코 같은 선수들과 비교한다.[37] 반면에 낮게 평가하는 이들은 엄청난 간격을 보여주는데 주로 회자되는 선수로는 마크 비두카야쿠부가 있다.남아공월드컵 16강의 1등공신 야쿠부 무시하냐?

원래 격렬한 논쟁 끝에 의견의 양극화가 이뤄지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차범근의 위상 논란은 유독 심한 편인데 이유야 많겠지만 정확한 정보의 부재가 크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분데스리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으며, 키커의 평점이나 선수랭킹을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근래의 일이다.[38] 덕분에 차범근에 대한 정보는 몇 안 되는 기록물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의 회고, 그리고 정말 가끔씩 나오는 해외언론의 언급이 다였다. 문제는 이 자료들의 신빙성이 꽤 높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억에 의한 구전이라는 건 당연히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스포츠라고 예외는 아니다.[39] 1986년대한축구협회에서 출간했던 '한국축구 100년사'라는 서적에 차범근의 이적과정이 실려 있는데, 정작 차범근이 잘못된 내용이 많다고 빨간줄을 직직 그었을 정도이며 당사자인 차범근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발언의 내용이 바뀌고 사실관계가 다른 인터뷰를 하니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과 실제 기록은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40] 사정이 이렇다보니 차범근에 대한 일화들은 어느새 신화처럼 자리잡았고 이를 두고 극단적인 논쟁이 이어져 온 것이다.

차범근이 뛰었던 1980년대의 축구계와 현재의 축구계가 다르기 때문에 현역선수와의 비교는 어려운 일이며, 애초에 선수평가는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41] 그럼에도 굳이 차범근의 위치를 평가해본다면 분데스리가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으나 리그에서 손꼽히는 공격수이자 중상위권 클럽의 핵심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42] 혹자들은 차범근의 높은 평점을 근거로 차범근이 분데스리가 최고의 선수였다고 말하는데 키커의 평가를 참고하겠다면 시즌 평점보다는 반시즌 동안의 활약을 정리하는 결산인 랑리스테를 우선시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평점순위가 높은 선수가 랑리스테에서는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건 굉장히 흔한 일이며[43] 차범근에 대한 키커의 평가는 좋은 편이지만 리그 최고라고 부를 수준은 아니다.[44] 차범근이 키건을 제치고 1위로 월드클래스를 받은 적이 있으니 그와 비슷한 수준의 선수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키커 랑리스테는 반시즌짜리 평가이고 커리어를 배제하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선수가 1위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심지어 발롱도르 수상자가 1위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45] 차범근이 키건을 제친 건 결국 반시즌에 불과하다. 2012년 여름의 카가와 신지가 유일하게 월드클래스를 받았지만 분데스리가 최고의 선수로 불리지는 않았던 것처럼 단지 1번의 평가만으로 선수의 위상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다.

키건-루메니게와의 라이벌 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오래 유지된 것도 아닐 뿐더러 꼭 대등한 수준의 선수만 라이벌로 묶이는 것도 아니다. 프랑크 리베리가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뛸 때 라이벌로 엮였던 선수는 지에구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였으나 이 셋의 활약상이나 위상에는 굉장히 큰 간격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분데스리가 선수들과는 달리 차범근은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티보, 프랑스의 옹즈, 영국의 월드사커와 같은 언론이 주관한 올해의선수나 베스트11에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46] 이는 분데스리가의 다른 스타플레이어들이 각종 수상에서 순위권에 오르고 베스트11에 선정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허나 주의해야할 부분은 차범근이 온 유럽에 이름을 각인시키기에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나(사실 몇명이나 각인을 시키겠는가?) 커리어 하이라고 볼 수 있는 79/80시즌 때 80유로에 이목이 쏠리면서 각종 유럽 유명 잡지에서 불이익을 크게 받은 것은 사실이다. 대조적으로 알 수 있는 선수가 클라우스 알로프스인데, 80유로에 나간 우승 멤버 중 한 명인덕에 다른 유럽국가에서 선정하는 세계 베스트11(유럽 베스트11)를 뽑을때 꽤나 표를 받았지만 정작 독일 잡지인 키커지에서의 랑리스테, 평점 모주 차범근에게 밀리고 분데스리가 리그 베스트11의 공격수도 루메니게-흐루베쉬-차범근 셋이였다. 반면 차범근은 다른 유럽국가의 유명 잡지서는 표가 없다시피한다. 유로에 묻힌 탓에 득표율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꾸준히 정상급의 기량을 선보인 선수라기보다는 선수생활 중간중간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덕에 선수생활 전반의 평가가 높아진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47] 이 2시즌에 집중 되어 있다고는 하나 다른 시즌 또한 이 못지 않은 활약을 해주었다(79/80시즌이 대단하기는 했으나 이 1년을 제외한 9년은 비슷비슷하다.) 또한 이 2시즌 모두 리그 최고라는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즉 차범근의 위상은 80년대 유럽과 리그에서 최고가 아니였다(리그 최고면 유럽최고 중 한명이긴하다) 하지만 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은 분명 손에 꼽을만한 공격수이며, 외국인 포워드 중에는 단연 최고였다. 리그최고 보다는 리그 정상급을 오랜기간 유지해준 선수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본다. 골닷컴에서 차범근을 분데스리가 최고의 용병 3위로 선정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사실 이 순위를 자세히 따져보면 이상한 구석이 좀 많다. 하지만 이 또한 나름 신빙성은 있다. 단지 이는 선수의 기량보다는 업적을 중시한 느낌이다. 예를 들면 윈턴루퍼와 케빈 키건(발롱2회) 두 선수의 기량 차이는 명백하나 윈턴루퍼가 오세아니아 최고 선수로서 이름을 알리고 선구자 역할을 한덕에 비슷한 순위에 올라있다.</ref>

포지션 논쟁[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축구계 최고의 떡밥(2)[48]

차범근의 포지션을 두고 논란이 발생한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차범근이 라이트윙으로 시작해서 중앙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꿨으며, 독일에서도 미드필더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기억의 혼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이것 때문이었다면 치열한 키배가 벌어졌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차범근의 위상을 더욱 높이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기록은 308경기 98득점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외국인 최다 득점이었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차범근처럼 오랫동안 독일에서 뛴 용병이 없어서지 득점력으로 따지면 당대를 기준으로도 결코 특출난 편이 아니었다.[49] 물론 득점이 공격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공격수가 골로 말한다지만 공격을 풀어가고 찬스를 만들어주는 능력의 차이로 골이 적은 공격수가 골이 많은 공격수보다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50]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골을 많이 넣는 공격수가 더 좋은 공격수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았고, 차범근의 득점기록은 정상급 공격수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편이었다. 대신 차범근이 윙포워드라고 가정하면 굉장히 뛰어난 득점기록이 된다. 그래서 2000년대 중후반까지 차범근의 위상을 설명할 때 꼭 나오는 표현이 '윙으로서는 대단한 경기당 0.3골'이었다.[51]

하지만 이런 주장은 키커의 80년대 분데스리가 경기 기록지가 공개되어 차범근이 중앙공격수로 뛰었음이 증명되자 무너졌다.[52] 차범근이 분데스리가로 건너갈 무렵에는 4-3-3의 시대가 끝나고 4-4-2로 전술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4-3-3에서는 윙과 센터포워드를 번갈아가며 뛰었고,[53] 4-4-2에서는 중앙공격수로 뛰었다. 4-4-2의 시대가 끝나고 3-5-2가 주류가 된 뒤에도 역시 중앙공격수로 뛰었으며, 1984/85시즌과 마지막 2시즌을 제외하면 꾸준히 톱으로 뛰었다. (1986/1987시즌은 조금 애매하다. 차범근이 1986년 월드컵 이후에 인대접합 수술을 받아 그 이후부터 체력 부담이 덜한 포지션으로 옮겨갔고 수술 이후에는 공격형 링커로 뛰었다고 했는데 공미인지 스트라이커였으나 링커역할인지 불확실하다)[54] 정리하자면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주로 소화했던 포지션은 우리가 흔히 섀도우 스트라이커, 세컨드 스트라이커, 딥라잉 포워드라고 부르는 투톱의 처진 공격수였다. 단 차범근이 중앙에 머무르지 않고 측면을 공격하는 성향이 있긴 했는데 1986 월드컵만 봐도 최순호와 투톱을 이룬 건지 라이트윙으로 나온 건지 싶을 정도로 현란한 측면플레이를 선보인다. 즉 스트라이커였으나 윙포워드 못지 않게 윙 역할을 해주고 찬스를 만들어주는 선수 였다. 또한 마지막 세 시즌(미드필더시절)을 제외한 득점력은 0.4골에 조금 못 미치는데(pk0골) 리그를 소위 씹어먹는 공격수에 비해 뛰어난 득점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안좋은 득점력이라 이야기하기엔 어불성설이다.

감독으로서의 역량[편집 | 원본 편집]

차범근의 감독 커리어는 표면적으로는 꽤 좋아보인다. 약체였던 울산을 우승경쟁이 가능한 팀으로 바꿔놓았고 월드컵도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 지역예선은 승승장구, 수원에서는 매년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이다. 그러나 차범근은 늘 지도력이 부족한 감독으로 여겨졌다. 울산 시절에는 K리그 초창기라 6개팀이 참여하던 시절이고 월드컵에서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과 별개로 차범근의 전술적 역량이 뒤처진 게 사실이었다. 수원은 매년 우승경쟁하던 K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었고 첫해부터 MVP 김대의와 브라질 올림픽 대표 마르셀을 영입해줄 정도로 지원도 빵빵했다. 당시 특급 유망주였던 김동현도 이때 영입된 선수.[55]

수원에서는 서포터들은 욕하고 타팀 팬들이나 축구에 큰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어찌됐든 우승은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그럴 법도 한 게 K리그 팬 사이에서 그렇게 논란이 많았던 윤성효보다도 승률이 떨어진다.[56] 물론 경기 수의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K리그 최고의 부자구단으로 호화로운 스쿼드를 이끌었던 감독치고는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낮은 편이다. 덕분에 수원 감독으로 있을 때는 뻥축을 신봉하는 차범근만 아니면 수원이 훨씬 좋은 성적을 냈을 거란 말이 많았다.[57] 후임이 윤성효라 문제였지...

엄밀히 말하자면 명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역량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범근이 독일에서 축구를 배워오긴 했지만 9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축구는 전술적으로 뒤처지고 있었고, 차범근은 그 독일축구조차 재해석하지 못하고 과거의 독일축구에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리그가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리그도 아니었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기에 차범근이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 이것은 차범근보다 1년 앞서 인천의 초대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던 독일의 베르너 로란트가 아쉬움만 남긴채 K리그를 떠난 것과 유사하다.[58] 여기에 대표팀 감독일 때의 일화를 보면 차범근 본인이 요구하던 플레이를 선수들이 따라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야, 이게 안 돼?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지도자로서는 범용한 경우가 많다는 속설에 부합하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59]

다만 감독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축구지도자로서의 차범근은 충분히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통해 유소년축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에서 배워온 유스시스템을 도입해 한국 유소년축구의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차범근축구교실.jpg

옹즈 몽디알[60] 1998년 1월호에서 소개된 차범근 축구교실.

우승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04 레버쿠젠

대한민국

  • 아시안컵; 준우승 : 1972
  • 아시안게임 : 1978(공동우승)
  • 메르데카컵 : 1972, 1975, 1977, 1978
  • 박스컵 : 1974, 1976 ; 준우승 : 1977
  • 킹스컵 : 1973, 1974, 1975
  • 홍콩 4개국 친선대회 : 1974

감독[편집 | 원본 편집]

울산 현대 축구단

  • K리그; 준우승 : 1991
  • 리그컵; 준우승 : 1993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 2004, 2006 ; 준우승 : 1991
  • FA컵 : 2009 ; 준우승 : 2006
  • 리그컵 : 2005, 2008
  • 슈퍼컵 : 2005
  • A3챔피언스컵 : 2005
  • 팬퍼시픽 챔피언십 : 2009

수상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감독[편집 | 원본 편집]

  • AFC 올해의 감독 : 1997

통산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클럽 리그 대륙 총계 비고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8-79 SV 다름슈타트 98 1 0 -[61] - - - 1 0 분데스
1979-8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1 12 4 0 11 3 46 15 분데스
1980-8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27 8 6 6 5 2 38 16 분데스
1981-8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1 11 5 1 8 1 38 12 분데스
1982-8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3 15 1 0 - - 34 15 분데스
1983-84 바이어 04 레버쿠젠 34 12 1 0 - - 35 12 분데스
1984-85 바이어 04 레버쿠젠 29 10 3 4 - - 32 14 분데스
1985-86 바이어 04 레버쿠젠 34 17 4 2 - - 38 19 분데스
1986-87 바이어 04 레버쿠젠 33 6 2 1 3 2 38 9 분데스
1987-88 바이어 04 레버쿠젠 25 4 0 0 10 2 35 6 분데스
1988-89 바이어 04 레버쿠젠 30 3 5 0 2 0 37 3 분데스
종합 독일 308 98 27 13 37 10 372 121

각주

  1. 문서마다 기록이 다른데, 독일 사이트들은 보통 179cm로 기록하고 있다.
  2. 한국 축구계라고 하기에는 현 국가대표팀 감독 울리 슈틸리케도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3. 뜬금없이 무슨 자동차보험이냐 싶겠지만, 동부화재의 과거 사명이 한국자동차보험이었고 그 산하에 있던 실업축구단이다.
  4. 당시에는 공군에도 축구팀이 있었고, 이 공군 축구단에서 뛰면서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
  5. 당시 인터뷰를 보면 현대가 큰소리만 쳐놓고 정작 본인에게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차범근이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현대의 창단은 차범근의 서독행과 맞물려 흐지부지됐고 1983년이 되어서야 창단한다.
  6. 썰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이 제동을 걸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차범근 본인도 그냥 풍문으로만 들었다고 하니 진위는 알 수 없는 이야기.
  7. 원래는 브레멘의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차범근의 슈팅 횟수를 득점으로 잘못 전해들은 프랑크푸르트가 하이재킹한 거라고 한다.
  8. 차범근이 토크콘서트에서 자신이 1980년 키커가 매기는 선수등급에서 키건과 루메니게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 그러나 루메니게는 독일인이라 외국인 차범근과 같은 랭킹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잘못 말해줬거나 전반기 공격수 1위였던 평점 순위와 혼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후반기 평가는 키건과 차범근 둘 다 월드클래스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로 내려갔고 순위는 각각 1위, 5위였다. 루메니게는 중앙공격수 랭킹에서 2번 다 월드클래스 1위.
  9. 그런데 차범근이 딱 1번 루메니게보다 높은 등급을 받은 적이 있다. 1985/86시즌 후반기에 차범근은 인터내셔널 클래스를 받았고 루메니게는 그보다 낮은 K를 받았다. 루메니게는 부상으로 고생하던 터라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고 이후 분데스리가로 복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게 마지막 평가였다.
  10. 1980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서도 5표를 받아 12위에 올랐으며, 외국인으로선 키건 다음으로 높은 순위였다. 반면 1986년에는 1표를 받는데 그쳤다.
  11. 당시 키커의 시즌 베스트11은 주간 베스트11 선정횟수로 정하는데 8회로 전체 5위였다. 지금은 포지션 평점으로 선정한다.
  12. 차범근이 2차전에서 로타 마테우스를 따돌리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
  13. 팀원들이 뒷받침해주지 못한 탓이라고 부연하긴 했다.
  14. 차범근은 8주간 결장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4주다.
  15. 농담이 아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뛸 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키커 랑리스테에서 K등급 밑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현재 한국축구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손흥민은 2014/15시즌에 처음으로 K를 받아봤으며, IK 이상을 받아본 아시아인은 호주를 포함해도 단 4명뿐이다.
  16. 당시 이탈리아밀란나폴리가 이적제의를 했다고 해서 빅클럽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선수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밀란은 승부조작의 영향으로 승강을 반복하던 중소클럽이었고 나폴리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전이었다.
  17. 세리에 A로 가지 않고 분데스리가에 남은 이유는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선수들을 속여서 주택문제로 막대한 빚이 생겼고 그로 인해 발이 묶였었다고.
  18.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이렇게 3번의 전성기가 있었다.
  19. http://www.eintracht.de/aktuell/40463/
  20. 크라머는 일본 올림픽 대표팀을 지도했었으며 일본축구의 아버지로 불린다.
  21. 이후 우리나라 올림픽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2. 공교롭게도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할 때 걸렀던 브레멘 역시 강등당했었다. 그래도 곧장 2부리그 우승하고 나중에는 분데스리가 우승까지 차지했으니 브레멘에서 뛰었다면 커리어에 리그 우승이 추가됐을지도? 그럼 UEFA컵 우승을 못했겠지 레버쿠젠한테 져서 우승 못한 건데?
  23. 랑리스테도 수비형 미드필더 부문으로 평가받았다.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중미 없이 수미/공미로 포지션을 나눈다.
  24. 2015년 10월 기준으로 출장은 11위, 득점은 6위다.
  25. 1위는 클럽의 역대 넘버원인 울프 키르스텐이고, 2위는 독일의 간판공격수였던 루디 푈러 現 레버쿠젠 단장이다.
  26. 현재는 11위로 밀려났다.
  27. 당초 차범근의 A매치 기록은 121경기 55득점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대한축구협회에서 기록을 정리하다 누락이 있음을 확인하고 132경기 59득점으로 정정했다. 남은 3경기는 당연히 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한 1986 월드컵이다.
  28.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중앙공격수가 주 포지션이었지만 이때의 기억 때문에 라이트윙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29. 차범근이 가장 기억나는 경기로 꼽은 적이 있다.
  30. 실제로 차범근은 올림픽 출전을 사양할 때 팀워크를 해칠까 우려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31. 황선홍, 홍명보, 서정원, 김주성, 유상철, 하석주, 김병지, 김도훈 등 한국축구의 거목들이 대거 출장한 대회였으나 예선부터 경기력이 엉망이었다.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벼르던 이란전은 충격 그 자체였는데 후반전에 5골을 내주며 무너진 게 홍명보가 주도한 항명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32. 물론 이런 전술을 처음 쓴 것도 아니었고 국내언론들도 이렇게 경기를 준비할 거라는 것을 알고 프리뷰를 썼었다. 문제는 이 전술이 성공했을 때의 상대는 아시아 국가들이었고, 월드컵에서의 상대는 네덜란드였다는 점이다.
  33. 차범근에게 일생일대의 굴욕이자 충격인 건 당연한 얘기고 그 아들인 차두리에게도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34. 중국에 있던 차범근은 팩스로 소명서를 보냈다.
  35. 페차이우올리는 이후 독일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다 호펜하임 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중국의 광저우 에버그란데 유스팀에서 일하고 있다.
  36. 물론 이견이 없는 건 아니라서 박지성파울리노 알칸타라가 거론된다. 박지성은 대단한 커리어를 갖고 있지만 선수 개인의 실력이 리그 정상급으로 평가받았던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알칸타라는 100년 전의 인물인 데다 스페인 국가대표로도 뛰었던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보통 차범근을 최고로 놓는다.
  37. 포지션이 다른 피구와 셰바가 언급되는 게 의아할 수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한동안 차범근의 포지션이 윙포워드라는 게 대세였기 때문에 그때는 피구나 라이언 긱스 같은 인물들과 비교했다. 지금은 다시 센터포워드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뛰어난 공격수인 셰바와 비교되는 것.셰바도 윙포워드로 뛴 적 있는데?
  38. 애초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위의 키커 표지가 오래 전부터 돌아다녔음에도 차범근이 랑리스테 WK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9. 대표적인 사례를 야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박찬호LA 다저스에서 뛰던 시절 팀의 마무리투수 제프 쇼는 박찬호의 경기를 자주 말아먹어 '불쇼'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수준급 마무리였으며 오히려 박찬호가 나올 때 더 잘 던진 선수였다.
  40. 당장 이 문서의 9번과 15번 주석만 봐도 오류가 나온다. 2014년에는 소련 영토였던 도네츠크를 방문했던 일화를 썼는데 실제 방문한 연도와 참가했던 대회를 잘못 적었다. 배성재가 기록 보고 확인해줬다는데 뭘 본 거지?
  41. 예를 들어 1999년 브라질의 플라카르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면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라위프, 가힌샤, 프란츠 베켄바우어 순으로 평가했고 아르헨티나의 엘 그라피코는 4위에 가힌샤 대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선정했다.
  42. 차범근 본인도 '루메니게나 브라이트너 등이 서 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43. 2014/15시즌 전반기 공격수 평점 1위였던 막스 크루제는 K-7에 그쳤다.
  44.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동안 루메니게는 항상 차범근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으며 푈러 역시 차범근보다 낮은 등급을 받은 적이 없다. 여기에 클라우스 피셔, 호어스트 흐루베쉬, 클라우스 알로프스 등의 독일 공격수들이나 브루노 페차이, 장-마리 파프, 쇠렌 레어비, 아우스케이르 시귀르빈손 등의 외국인 선수들도 결코 차범근에게 뒤지지 않는다.
  45. 1990년 여름의 로타 마테우스는 월드클래스긴 했지만 포지션 3위에 그쳤었다.
  46. 한편 1999년 월드사커가 독자투표로 20세기 최고의 선수를 선정할 때, 참고하라고 제시한 2차 후보군에 포함된 적이 있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1점도 얻지 못했다.
  47. 차범근의 수상실적과 높은 평가는 1979/80시즌과 1985/86시즌, 이 2시즌에 집중되어 있다.
  48. 치열한 떡밥이긴 했으나 요새는 떡밥의 유통기한이 거의 다했다.
  49. 차범근의 부인 오은미가 차범근의 인터뷰에 끼어들어 골을 넣는 선수는 아니었다면서 루메니게랑 푈러랑 비교도 안 되게 차이가 많이 났다고 놀린 적도 있다 근데 여사님 그 두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 반칙인데요
  50. 가령 케빈 키건은 1978년 한해동안 25경기 8득점을 기록하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51. 심지어 차범근은 당시에는 없었던 윙포워드라는 포지션을 만든 선수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52. 사실 이전에도 차범근이 본인은 중앙공격수로 뛰었다고 인터뷰를 했었지만 윙포워드로 뛰었다고 답한 인터뷰도 있어서 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말을 바꾼 차범근이 잘못한 걸로…
  53. 1979년에 차범근이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스리톱의 센터포워드로 뛰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 경기의 키커 기록지에는 라이트윙으로 나오는 게 함정.
  54.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기록지를 보면 투톱으로 뛴 경기 수가 70% 이상이다.
  55. 물론 김동현은 승부조작과 부녀자 납치로 축구계의 흑역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기대주였다.
  56. 차범근이 241전 42.3%, 윤성효가 97전 49.5%
  57. 아이러니하게도 취임할 때 차범근이 표방한 스타일은 컴팩트한 축구였다.
  58. 재밌게도 로란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3시즌 동안 같이 뛰었었다.
  59. 여담이지만 명선수가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건 편견이다. 지도자로 실패한 스타플레이어도 많지만, 지도자로 성공한 스타플레이어도 무수히 많으며 현장에서는 웬만큼의 커리어가 없으면 감독으로 써주지도 않는다. 선수경력이 일천한 감독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감독이 선수들한테 무시받는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
  60. 위에서 언급된 옹즈와 몽디알이 합병해 만들어진 프랑스의 축구언론
  61. 차범근이 입단하기 전에 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