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Cranezyer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9월 25일 (일) 17:53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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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白南基, 1947년 10월 8일 ~ 2016년 9월 25일)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농민이다. 2015년 제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 측의 차벽을 치우던 도중 물포를 조준 사격당하여 쓰러졌고, 이로 인한 뇌출혈로 인해 317일동안 중태에 빠졌다가 사망하였다.

생애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난 백남기는 광주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시기에 각각 한 번씩[1] 제적당하였고, 한동안 천주교 수도사 (세례명 임마누엘) 생활을 하였다. 그는 1980년 복교해 총학생회 부회장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어나갔으나, 계엄군에 체포되어 동년 7월 퇴학당한 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삼일절 특사에서 가석방되어 귀향하였다.

1983년 복권되었으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였고, 이후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에서 활동하였다.

제1차 민중총궐기

2015년에는 제1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하여 여타 농민 단체 회원들과 함께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쌀 수매가 현실화 공약을 지키라는 시위를 하였고, 일몰 후 닭장차로 쌓은 차벽을 밧줄로 당겨 철거하는 선봉대에 동참하였다가 직사한 물포를 맞고 뒤로 넘어졌다. 경찰 측은 쓰러진 그와 구호작업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계속 물포를 직사하였고, 구급차를 통해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된 후에는 4시간여동안 수술받은 뒤로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한 때 사망설이 나돌아 시위대가 격해지기도 하였으나 오보로 밝혀졌다. 이후 그는 '백남기 농민'으로서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여러 차례 쾌유 기원 집회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중앙대학교 민주동문회에서는 그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죽음

2016년 9월 24일, 칠순 생일을 맞았지만 백남기는 계속해서 위중한 상태였고, 상태가 꾸준히 악화되어 결국 의료진도 연명치료 불가 입장을 천명한 지 하루만인 9월 25일 오후 2시 14분에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형사사건의 방침 상 임의로 시신을 부검하려는 검찰 측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처럼 사인 조작을 우려하는 대책위원회 간 대립이 작성일 현재 이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주석

  1. 1971년 위수령 사태 시위, 1975년 전대련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