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백

金成伯(또는 金星伯, 金成白).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7년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읍 28번지에서 출생했다. 그가 일본 형사에게 진술한 바에 따르면, 2살 때인 1869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멍고가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후 1874년 7살 때 우수리스크로 재차 이주했으며, 1884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뒤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부친의 이름은 '이반 이바노비치 김'이며, 맏아들은 '와시리 이바노비치 김', 둘째인 김성백의 러시아 명은 '치혼 이바노비치 김', 셋째 김성엽은 '미하이로프 이바노비치 김', 넷째 김성기는 '알렉산도르 이바노비치 김', 그리고 다섯째 김성립은 '메이 이바노비치 김'이었다.

1898년부터 동청철도 건설에 참여하면서 막내 동생 김성립과 함께 연해주에서 만주 하얼빈으로 이주하였다. 동청철도는 만주리에서 하얼빈, 그리고 쑤이펀허 간의 철도선과 하얼빈에서 무순, 다롄까지 연결하는 총길이 2,430km의 철도선으로, 1903년에 완공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자, 김성백은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의화단원들의 철도 파괴에 맞서 동청철도를 수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의화단 운동이 진압된 뒤, 공로를 인정받아 1900년과 1901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중국출정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03년부터는 동지철도 건설공사 청부업에도 종사해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1] 또한 중국어와 러시아어 모두 능통한 점을 살려 통역으로도 활동해 러시아인과 중국인 간에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

김성백은 1909년 4월에 하얼빈에서 개교한 동흥학교에 관여했다. 그는 300루블의 학교 건립 자금 모금액 중에 가장 많은 출자금을 내놓았으며, 학교 운영에도 적극 가담했다. 그러던 1909년 10월 22일 저녁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한 안중근유동하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하얼빈 네스나가야 28호의 김성백의 집에 도착했다. 김성백의 남동생 김성기와 유동하의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유안나는 당시 약혼한 사이여서, 유동하가 안중근을 김성백의 집에 안내하는 게 가능했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에 짐을 푼 뒤 하얼빈의 동흥학교를 방문하여 김재형과 김성옥을 만났다. 안중근 일행은 이곳에서 중문판 신문인 <원동보>에 실린 “전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동철 철도총국의 특별 열차편으로 25일 관성자역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브체프를 만나려고 하얼빈으로 향한다.”라는 보도내용을 통해 이토의 상세한 일정을 확인하였다. 이어 어린 유동하를 대신해 조도선을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다음날인 1909년 10월 23일 아침, 안중근 일행은 하얼빈역 주변을 사전 답사하고 의거계획을 구상하면서, 하얼빈역은 경계가 심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열차가 중간역에 정차할 때를 기회삼아 의거할 것을 마음먹었다.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온 후, 안중근과 우덕순은 연명으로 대동공보사 이강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작성했다.

본월 6일(양력 10월 22일) 오후 당지에 내착하여 원동보를 본즉 이등은 내월 12일에 관성자를 출발하여 러시아 철도국 총독특별열차로 하얼빈에 도착한다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조도선과 함께 가족을 출영하는 것처럼 꾸며 관성자역으로 향할 것이다. 동역과 상거하기 전 몇 개 역쯤되는 어느 역에서 이등을 기다렸다가 거사할 계획인데 일의 성공은 하늘에 있는지라 요행히 동포의 선복을 기다려 도움을 받을 것을 바라나이다. 당지 김성백씨에게서 돈 5십원을 빌어서 여비에 사용했으니 갚아줄 것을 희망함. 대한독립만세!

이 편지는 일본 경찰이 김성백의 집을 수색하던 중 발견되어 증거품으로 몰수되었다. 안중근은 편지의 존재에 대해 심문받을 때 김성백으로부터 부족한 운동자금을 빌릴 요량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진술했으며, 김성백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아무 관련 없다고 진술했다. 김성백 역시 자신은 그저 안중근을 재워줬을 뿐이라고 진술했고, 일본 경찰은 그가 단순히 집을 제공재 준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11시간 만에 무혐의로 석방했다. 이에 대해 후일 하얼빈총영사는 "이토공 암살사건에 대해서는 그가 음모 획책에 참여한 가해 공범의 혐의가 충분하지만 러시아 국적자였기 때문에 검거망을 면하기에 이르렀다."고 가토 다카아키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2] 이후 안중근의 부인과 두 아들은 김성백의 집에 머물다가 1월 22일 정대호의 가족과 함께 하얼빈을 떠나 쑤이펀허로 돌아갔다.

한편, 김성백은 1907년경 공립협회 만주지방회를 설립했고, 1909년 7월 27일 미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인가를 받아내어 하얼빈 국민회 만주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하얿린을 비롯한 만주 각 지방회를 총괄하였으며, 1910년 2월에 하얼빈 만주지방총회 설립을 미주 국민회 본부에 청원해 인가를 받아 4월에 하얼빈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했다. 당시 김성백이 재북미총회장 황사용에게 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대저 나라는 백성을 인하야 세우고 백성은 나라를 힘입어 생활하나니 그 나라이 독립권이 無하고, 백성이 능히 자유권 보존하는 것을 들지 못하여시니 둥주리 덮은 아래의 완전한 알리 없음과 같이 그 백성이 단체력이 없고 그 나라의 독립권 이룬 자 어디 있는뇨. 가령 한 집이 기울어져 새로 건축하자하여도 한 나무로 그 집을 건축하기 불능할 터이오, 다수한 중목으로 새 건축함은 사람사람이 용히 할지라. 그런즉 우리 회의 동포더러 조국의급업정형을 염급함에 열심히 불등하고 담을 맛보는 것은 다만 독립자유를 위하야 일분자의 의무를 진코져 백백의 일개와 만의 일원으로 퇴폐한 국가를 회복하고 싶은 한 자유독립을 완성할 여하옵기 자에 동정을 표하야 앙고하오니 꼬옥 귀회 첨공은 조량하심을 경뇨.

1910년 한일병합 소식이 하얼빈에 전해지자, 분개한 한인들은 1910년 10월 19일 국민회 지방회관에 모여 임시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이날 <신한민보>에 '할빈동포들의 혈서'를 게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인아. 네가 일인이 너의 나라 멸망시킴을 잊었느냐.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우리의 조국을 세울지니 만약 이 맹세를 저버리거든 신명과 사람이 아울러 주륙하라 하였더라. 할빈은 안의사의 성공한 땅이며 여사한 애국동지가 있는 곳이라. 우리의 마음이 단결하고 행동이 일치하는 지경에 무엇을 이루지 못할 바가 있으리오.

국민회가 대한인 국민회로 개편된 이후인 1911년 9월 20일에 하얼빈 만주지방총회 산하 9개 지회 조직을 두었다. 9개 지회 조직은 하얼빈역으로부터 수분하로 이어지는 중동철도 관할 수용지역인 철도연선 지점에 형성된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그 후 한인들이 '망국민' 취급을 받아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김성백이 이끄는 하얼빈 만주지방총회는 러시아 귀화 입적 사업을 추진했다. 김성백은 만주 각 지방회(하얼빈, 석두하자, 황도하자, 목릉, 백도납, 만주리, 동삼성)에 격문을 보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대저 우리가 오늘날 저 원수 인종의 속박, 압제에서 벗어났어도 그 범위 밖의 땅에서 활동한다 해도 만일 러시아 국적으로 입적하지 않으면 각국 사람들은 우리를 확실한 일본인으로 인정하므로 부득불 러시아에 입적하는 것이 옳다.

김성백은 러시아 국적으로의 입적 조치를 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만주지방회 각 회원들 663명의 동의를 얻어 이름과 연령을 기록한 입적 서류를 준비해서 단체로 하바로브스크 행정관에게 입적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예의 주시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제 정보원들은 김성백이 "불령의 원흉"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3] 일본 영사관 경찰은 만주의 각 국민회 지방회를 은밀히 조사하고, 회장의 성명과 한인들의 거류 사항 등을 파악하였으며, 동흥학교 한인교사와 학생 수를 조사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해산당한 일진회원들이 만주지역으로 몰려와 밀정 노릇을 하며 하얼빈 만주지방총회의 동정을 정탐하였고, 심지어 회원임을 사칭하며 암약하였다. 이에 국민회지방총회는 미주 국민회에 요구하여 일종의 신분증인 여행표를 발행해 각 지방에 분급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하얼빈 지방총회는 점차 러시아사회에 동화되어가는 한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국민의식을 확실히 가질 수 있도록 국경일과 전통명절을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의거를 독립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표상하며 동포사회에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의열투쟁의 정신을 독립정신으로 드높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안의사 전기 간행 사업이 착수되었고, 안중근 가족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안중근의 유족을 구제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된 안중근 기념배지는 국민회 회원들에 판매되었고, 회원들은 안중근 기념배지를 대의원총회 때 자랑스럽게 달고 참석하였다. 러시아 정보 보고서는 대한인 국민회 조직원들이 빨치산 부대원들이며,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인식표로써 안중근의 사진을 새긴 금속제의 표식을 가슴에 달아 표징으로 삼고 있다고 보고했다.[4]

김성백은 동흥학교의 운영에도 적극 가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 이래로 폐교된 동흥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개학을 설득해 1909년 12월 중순에 다시 학교 문을 열게 하였다. 이에 대해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은 1910년 1월 15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서를 보내면서, "동흥학교는 학교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일종의 구락부로서 배일한인의 소굴이다."라고 지목했다. 동흥학교는 1910년 9월에 학교이름을 대한기독교 동흥학교로 개명하였으며, 교육목적을 "국한문과 역사, 산술 등 각 실용과정을 교수"하는 데 두었고, 민족주의 교육 역시 병행했다. 이 학교에서는 <국민 독본>, <금수회의록>, <20세기 조선론> 등 국내에서는 이미 금서로 지정되어 사라진 애국 교과서들을 교재로 사용했다.

동흥학교는 학년제를 실시하지 않고 영문과와 러시아과 두개 반을 두고 수업했다. 수업과목으로는 중문, 한글, 러시아어 3개 과목으로, 우선 어학 중심 교육 과정을 두었다. 초기 학생은 중문과에 8명, 러시아과에 20명으로, 재학생은 28명이었다. 중문 과목은 김재형이, 한글 어문 과목은 탁공규가, 그리고 러시아 과목은 '와시리우 사레우이찌'라는 이름의 러시아인이 가르쳤다. 설립 당시 교장은 김재형, 학교 교주는 탁공규였으나 얼마 안 되어 김성옥이 교주로 임명되었다. 김성백은 교장으로서 학생 모집에 힘을 기울여, 1911년 무렵 62명의 학생을 받아들였다. 학교 안에는 교회를 설립하여 장로교 연해주 파견 선교사인 최관흘 목사와 감리교에서 파견한 손정도 목사 등이 학교를 방문해 1912년 5월 29일 예배식을 거행했다. 손정도 목사는 이 자리에서 일본화를 막고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방도로 기독교에 귀의하고,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빼앗겨 식민통치되는 굴욕의 지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교했다.

1912년 7월, 김성백은 가쓰라 타로 하얼빈 일본 총리가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하얼빈을 통과할 때 암살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대한인국민회 만주지방총회에 의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인물들과 교제하고 가쓰라 공작에 대한 살해 음모를 협력했다고 한다. 일본 영사관은 이를 빌미 삼아 러시아 당국에 수 차례 하얼빈 국민회 지방회 조직을 해산하고 김성백을 하얼빈에서 추방시키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 결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경찰과 러시아경찰이 합동으로 김성백의 집을 급습하였고, 김성백의 집에서 중국인 옷과 리볼버 권총, 땋아진 변발이 압수되었다.

일제는 안중근이 체류한 적 있는 김성백의 집에서 발견된 변발과 중국인 옷을 증거로 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암살 음모를 했다는 혐의를 씌워 러시아 당국에 추방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성백은 중국인 옷은 중국인이 주었고, 변발은 중국인의 아내 안나 미하일로바의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리볼버 권총은 1908년 4월 2일자 No, 3107로 민간국의 권총 착용 권리에 대한 확인증명서가 있어 반환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변발과 사진 13장, 권총착용증명서 및 메달을 반환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는 안중근 의거 당시 김성백은 안중근 의거 사실을 절대 모르지 않았다며 그 유죄의 증거를 제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 경찰 측에서는 간접 증거라며 일본 측 주장을 일축하였다. 그러자 하얼빈 일본 영사관은 "이것이 만일 러시아 관리에 대한 암살 음모였다면, 러시아 경찰은 충분히 유죄 증거로 판단했을 것이다."라며 러시아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다.

이렇듯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이 김성백의 추방을 집요하게 요구하자, 러시아 당국은 김성백 거취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1912년 10월 11일 동지철도 관리기관 산하 특별간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한국인 치혼 이바노비치 김을 동지철도 지역 내 공안과 안녕이 해로운 사람으로 간주하고 철도지역 바깥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김성백은 추방 통보를 받자 즉각 항의했다. 그는 하얼빈 동지철도 지역에 재산과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추방하는 것은 파멸 선언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러시아 국민이며, 그리스 정교도이며, 조국 러시아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일도 행한 적이 없고, 항상 러시아의 복지를 위해 봉사하고 있음을 들어 추방 명령을 폐기해줄 것을 요구했다.[5]

꾸프리야노프 헌병대위는 이 서신을 러시아 외무부장관에게 전하는 동시에, 직접 탄원서를 올려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성백 활동을 억압하고 중지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이토의 살해와 가쓰라 타로 살해 음모 증거로 제출한 자료들이 정확하고 완전한 증거가 아니며, 김성백은 활동적인 선동요원이며 도로 지역에 체재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니 추방 결의를 폐지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 김성백은 연흑룡주 총독인 곤다찌와 동지철도 관리기관장 호르바트 장군과 그의 보좌역인 아파나시예프 장군, 이르쿠츠크 군관구의 참모본부 등 러시아의 군 당국과도 긴밀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당국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그러자 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 대사는 러시아 당국이 형식적인 회답을 하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하면서 김성백의 추방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결국 1912년 중동철도 관리기관 특별간부회의에서 김성백을 하얼빈에서 추방한다는 결의가 결정되었고, 러시아 재무부에서도 추방을 재확인했다. 그를 푸쨔쟌시 혹은 연해주 우수리스크군 라즈돌리닌스카야읍으로 이주케 한다는 조치가 내려졌으나, 김성백은 하얼빈을 수시로 출입하고 생활 기반을 하얼빈에 그대로 두고 있어서 완전한 추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은 91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까지도 김성백이 하얼빈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살면서 각지의 배일 조직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과 러시아는 동맹 관계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 당국에게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가능한 한 러시아 밖으로 퇴거시킨 후 조선총독부에서 압송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과, 러시아 국적자일 경우 체포가 어렵다면 그들을 시베리아 오지로 이주케 한 뒤 경찰 감시 하에 둠으로써 독립운동가들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특히 중동철도 부속지에서 활동하는 배일선인의 위협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김성백과 김성립, 그리고 안정근안공근의 체포에 열을 올렸다.

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대사관은 독립투쟁을 하는 한국인 명단을 하얼빈 러시아 총영사관에게 통보하고, 중동철도 구역 안에서 반일 투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러시아 외무부로 통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혼다 일본대사는 러시아 총영사에게 김성백, 김성립 형제와 안정근, 안공근 형제, 유장춘, 문태석에 대한 추방 조치를 확실히 내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김성백, 김성립 형제가 왜 하얼빈에서 추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모를 제출했다.

러일전쟁 전에 김성립은 그의 형제인 김성백과 함께 하르빈에서 살았다. 일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지니고 있다. 그의 형제와 함께 이토 공작의 살해와 가쓰라 공작의 살해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자신의 러시아 국적을 이용하여 과감하게 행동하며 안중근을 숭배하며 공개적으로 제2의 안중근이 되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중략)

김성백은 김성립의 형제로 조선인학교의 선생으로 1908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협회를 설립하였는데 그 협회의 의장직에 있다. 이토 공작의 살해 공범의 혐의를 받았다. 일본의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있으며, 자신이 러시아 국적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안심하고 고위 일본인들의 살해에 자신의 부하를 선동하는데 열중하였다. 하르빈에서 그를 추방하도록 일본 총영사가 러시아 당국에 호소한 결과 이 도시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곧 돌아왔으며, 각양각색의 일본에 대항하는 단체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 있는 반일단체와 비밀 관계를 맺고 있다.

- 혼다 일본대사가 러시아 외무장관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에게 보내는 밀서(1915. 12. 4),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결국 러시아 당국은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1915년 3월 김성백을 하얼빈에서 추방하였다. 김성백은 잠시 하얼빈을 떠났지만, 극비리에 하얼빈에 왕래했기 때문에 완전한 추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1916년경 일본과 러시아의 동맹 관계가 무르익으면서, 러시아 당국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러시아 당국은 일본의 독촉에 따라 김성백을 비롯하여 만주와 국경지역에서 반일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을 하얼빈 혹은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이르쿠츠크 총독 관리 하로 추방시킨다고 결의했다. 이에 김성백은 1916년 9월 6일 러시아 내무장관에게 추방 명령을 폐지시켜줄 것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잠시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가 이르쿠츠크에 정착했다.

그 후 몇년간 행적이 묘연했던 김성백은 1920년대 초반 한인공산당 이르쿠츠크 계열이 활동했던 극동공화국정부 한인부에서 근무한 사실이 일제 정보기록에 기술되었다.[6] 그리고 이르쿠츠크 조선인민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후원한 사실 역시 일제 정보기록에 기재되었다.[7]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김성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

  1. 김성백은 1907년부터 부두구 레스나가야 거리 28호인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에서 거주하였고, 안중근 의거 이후에 이사한 곳은 레스나가야에서 시얼커프왕작 거리 40호의 2층 벽돌집으로, 상, 하층 합해 10여 칸 되는 집이었다. 1913년에는 하얼빈 보도쁘로보드나야 로 8-10호에 거주했다.
  2. <재러선인배일운동 근절방법에 관한 건> 관비 제8호(1915. 8. 6.), 배일선인의 퇴로처분에 관한 건 기밀 제57호(1914. 12. 22)
  3. <불령단 관계 잡건>, 조선인부, '하얼빈 지방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동정에 관한 보고의 건', 정치기밀 34호(1915. 9. 29)
  4. 자바이칼주 헌병사령부 사령관 육군중령 불라호프가 자바이칼주 총독에게 보낸 보고(1916. 2. 11).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5. 이르쿠츠크 군관구 참모장과 독립 특수부대 헌병 대위 꾸프리야노프의 서신에 동봉된 김성백이 러시아 재무장관에게 보낸 항의서(1913. 1. 8)
  6. <지다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관참첩 제262호 정보 제 204호(1921.5.9)
  7. <조선의 행동에 관한 건>, 불령단 관계 잡건, 조선인부, 재시베리아(9) (19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