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경성제국 대학의 학부구성과 진출분야, 사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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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국내의 대학은 대학이라는 이름 대신 전문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대학령에 따르면 대학 설립이 가능했으나 일제는 이마저도 방해하였다. [[1920년]] 경 보다 수준높은 고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민립대학 설립 운동|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실제로 상당한 요건을 갖추어 신청하자 이를 달래고 [[문화통치]]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일본이 만든 대학이다.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국내의 대학은 대학이라는 이름 대신 전문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대학령에 따르면 대학 설립이 가능했으나 일제는 이마저도 방해하였다. [[1920년]] 경 보다 수준높은 고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민립대학 설립 운동|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실제로 상당한 요건을 갖추어 신청하자 이를 달래고 [[문화통치]]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일본이 만든 대학이다.


== 학부 구성==
== 해방 이후 ==
 
조선총독부는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학부구성은 법무학부와 의학부, 2개의 학부에 불과했다. 경성제국대학은 두개의 학부만을 계속 유지하다가, 군수공업을 위한 기술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1941년에 이공학부가 창설되었다.
 
== 진출 분야==
 
경성제국대학 졸업을 통해 졸업생들이 공식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분야를 살펴보면 법학과를 이수한 학생은 학사시험을 거쳐 법학사가 되어 고등문관, 외교관, 영사관, 사법관 등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학부를 이수하여 문학사의 자격을 얻은 학생들은 법정과목에 대하여 중등교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의학부를 이수한 학생의 경우에는 학사시험을 거쳐 의사자격증을 취득하여 병원에 취직하거나 개업을 할 수 있었다
 
==사회에 미친 영향==
 
“경성제대 법학과에 입학하면 군수자리는 절반쯤 따논 당상” 이라는 당시의 평판이 있던것처럼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이른바 출세를 보장하는 경로가 되면서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사회에 확실한 위치를 점유해 나갔다. 전통적인 관 우위의 한국적 풍토에서, 압박받는 다른 조선민중과 달리 식민지 고급관료로서의 길이 열려 있는 경성제국대학의 입학기회는 개인적, 사회적으로 이른바 입신출세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식민지 체제 내에서 대학교육과 ‘관료로서의 입신출세’의 밀착된 결합구조가 형성되었다. 결국, 일제 식민지 체제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이라고 하는 근대 대학의 모델이 이 땅에 자리잡음으로써, 해방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는 왜곡된 대학체제와, 문화, 대학인식이 형성,확산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국립대학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에는 사람들이 동의했으나, 단과대학만 있는 대학 성격의 교육기관들을 합병시킬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결국 서류상 폐교 후 [[서울대학교]]를 건립하게 되면서 국립 서울대학교로 재산과 건물, 학적이 모두 승계되었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국립대학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에는 사람들이 동의했으나, 단과대학만 있는 대학 성격의 교육기관들을 합병시킬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결국 서류상 폐교 후 [[서울대학교]]를 건립하게 되면서 국립 서울대학교로 재산과 건물, 학적이 모두 승계되었다.



2023년 12월 1일 (금) 12:20 기준 최신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은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이 경기도 경성부(현대 대한민국의 서울)에 세운 제국대학이다.

설립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국내의 대학은 대학이라는 이름 대신 전문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대학령에 따르면 대학 설립이 가능했으나 일제는 이마저도 방해하였다. 1920년 경 보다 수준높은 고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민립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실제로 상당한 요건을 갖추어 신청하자 이를 달래고 문화통치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일본이 만든 대학이다.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국립대학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에는 사람들이 동의했으나, 단과대학만 있는 대학 성격의 교육기관들을 합병시킬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결국 서류상 폐교 후 서울대학교를 건립하게 되면서 국립 서울대학교로 재산과 건물, 학적이 모두 승계되었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가면서 건물들만 덩그러니 남았는 데, 인문학·의학 계열이 집중된 동숭동의 터는 대부분 감쪽같이 밀리고 의대만 남아 지금의 서울대 연건캠퍼스에 편입되었으며, 공릉동의 이공계 계열 건물들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건네받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