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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상륙부대는 팔미도등대의 신호를 따라 인천항으로 항했으며, 그 결과 [[6.25 전쟁]]의 판세가 뒤바뀌게 된다.
연합군 상륙부대는 팔미도등대의 신호를 따라 인천항으로 항했으며, 그 결과 [[6.25 전쟁]]의 판세가 뒤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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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일 (금) 00:06 판

틀:등대틀:문화재

개요

한반도 최초의 등대

1876년 체결한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인천항이 개항했지만 리아스식 해안의 영향으로 인천만에는 도처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항만을 항행하는 선박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조일통상장정에 따라 항로표지를 조정할 의무가 있었고, 인천만을 항행하는 선박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등대를 건설했다.

현재는 2003년 완공된 신 등대가 선박을 안내하고 있으며, 옛 등대는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쉬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백신호

인천만의 복잡한 해안선과 조류는 인천상륙작전을 고려하던 연합군 사령부의 골칫거리였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인천만 중앙에 위치한 팔미도등대의 점등이 필요했다.

사령부는 작전 5일전인 9월 10일에 팔미도에 인원을 잠입시켜 등대의 상태를 알아보게 했다. 당시 팔미도등대는 전혀 운영이 되지 않는 상태이었기에, 혹시나 점등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 작전 시일 연기를 불러올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작전을 개시할 수 없게될 처지였다. 점검 결과 전기배선 1곳이 절단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고, 연합군은 이를 수리하여 14일 자정에 팔미도의 밤을 밝혔다.

연합군 상륙부대는 팔미도등대의 신호를 따라 인천항으로 항했으며, 그 결과 6.25 전쟁의 판세가 뒤바뀌게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