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First Italo-Ethiopian War)은 1895년부터 1896년까지 벌어진, 이탈리아에티오피아간의 전쟁이다.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삼겠다는 이탈리아 제국주의 야망은 이 전쟁의 참패로 산산조각났고,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유일의 자주독립국으로서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들 근대 이후 유색인종이 백인 국가와 전쟁을 벌여 이긴 사례로 러일전쟁을 꼽지만 사실은 이 전쟁이 먼저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여러 개의 토호국으로 나뉜 에티오피아는 오랜 전쟁 끝에 메넬리크 2세에 의해 통일되었다(1889년). 메넬리크 2세는 통일 전쟁 와중에 서양 열강, 특히 이탈리아의 협력과 지지를 받았고, 그 대가로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 우찰레 조약을 체결했다(1889년 5월 2일). 이 조약으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 지방의 이탈리아 영유권을 인정, 이 지역은 이탈리아 최초의 해외식민지가 된다.

문제는 우찰레 조약의 문구 해석에 있었다. 이탈리아측은 동 조약의 17항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에 있어 이탈리아의 자문을 받아야만 한다로 해석하고 실제 이탈리아어 조약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지만, 에티오피아측은 자문을 받을 수도 있다로 해석했다. 즉, 이탈리아는 우찰레 조약으로 에티오피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다고 생각했지만 에티오피아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고, 이에 대한 충돌로 메넬리크 2세는 1893년 우찰레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대로, 에리트리아에서 에티오피아 고원을 거쳐 소말리아로 이어지는 동북 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 완성을 위해 에티오피아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 이미 아프리카는 영국프랑스가 대부분 분배했고, 얼마 남지 않은 지역도 독일, 포르투갈, 벨기에가 나눠가진 상황이었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유럽 열강이 아직 건드리지 않은 마지막 지역이였기에 에티오피아 식민화에 실패하면 이탈리아는 더 이상 식민지를 확보할 수 없다는 실질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탈리아 내부의 제국주의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은 에티오피아 응징을 강력히 요구했고,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시도한 에티오피아의 친 이탈리아 반란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프란시스코 크리스티 내각은 에리트리아 총독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에게 침공을 명령했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개전 초 바라티에리 총독은 순조롭게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진군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에겐 문제가 있었는데 에리트리아에서 징집한 현지병력을 포함 총병력이 겨우 2만여 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본국의 크리스피 내각은 원정을 위한 증원군 파병을 거부했는데, 에티오피아 미개인들따위를 짓밟는데 대군이 필요하냐는 유럽 국가의 오만감에다가, 현실적으로 이탈리아가 대규모 원정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섞여 있었다.

반대로, 에티오피아군은 일부 반란을 일으킨 토호국들을 모두 진압한 후 메넬리크 2세를 중심으로 강력히 단결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확장에 반대하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을 받으며 근대무기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병력만 약 8만여 명으로 이탈리아군 총병력의 4배에 달하였으며, 그 외에 창과 활로 무장한 구식 군대도 10만여 명에 달하였다.

바라티에리 총독은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두었으나, 하나같이 구식 군대를 대상으로 한 승리였고 에티오피아군 주력부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1896년 1월 메크엘 전투(Battle of Mek'ele)에서 이탈리아군은 매복을 당해 천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고, 에티오피아군의 주력 부대는 메넬리크 2세의 지휘하에 차츰차츰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바라티에리 총독은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 공격해오는 에티오피아군을 막아낸 후 맞받아친다는 전략을 구상했으나 로마의 크리스피 내각은 2월 25일 전보를 통해 공세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공세에 나서지 않으면 총독을 해임하겠다는 통보를 했다.

해임 경고까지 받은 바라티에리 총독으로선 어쩔 수 없이 공세에 나서기로 했고, 2월 29일 밤부터 아도와(Adwa) 일대에 병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바라티에리는 에티오피아군보다 병력이 적지만 화력과 질적 수준의 차이가 어느 정도는 숫적 열세를 메꿔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바라티에리는 에티오피아군 총병력을 5만 내외로 오판했고 지리에 어두웠다. 반면, 에티오피아군은 최소 10만, 최대 15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결집한 상태였다.

1896년 3월 1일 벌어진 아도와 전투(Battle of Adwa)에서 이탈리아군은 부대를 삼분하여 공세에 나섰으나 지형 정보의 부족과 짙은 안개로 인해 상호간 연계가 되지 않아 3개 여단이 동시에 공세에 나서지 못했으며 연계 실패로 각 여단 사이에 커다란 틈이 발생하였다. 에티오피아군은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고 3만 대군을 집중투입하여 공세로 전환했고, 이탈리아군은 전면방어로 전환했다. 약 3시간에 걸친 혈전 끝에 이탈리아군은 질적 우세 속에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했지만, 지친 이탈리아군을 향해 에티오피아군은 메넬리크 2세의 친위대 25,000여 명을 이탈리아군 중앙을 향해 전격 투입했다.

이 예비대 투입은 결정적이었고, 이탈리아군 중앙은 붕괴, 본진까지 휩쓸렸다. 우익의 이탈리아군도 고립된 채 저항하다 괴멸되었고, 상대적으로 전투가 잠잠하던 이탈리아군 좌익도 퇴로가 차단당한 상태에서 에티오피아군 기병대의 돌격까지 당하며 저항하다 전멸했다.

아도와 전투의 참패는 이탈리아군에게 그야말로 재앙같은 일이었다. 총병력 17,700여 명 중 전사 7,000여 명에 부상 2,000여 명, 포로 3,000여 명으로 사실상 투입 병력 대다수를 잃었으며 총독 바라티에리는 겨우 탈출했으나 예하 여단장 3명 중 2명은 전사하고 1명은 포로로 잡히는 등 지휘부도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또,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모든 중포를 에티오피아군이 노획하면서 화력의 우위까지 잃어버렸다.

바라티에리는 잔존 병력과 에리트리아 식민지의 수비병력을 포함, 모두 에티오피아와의 국경에 투입하여 결사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었으나 에티오피아도 이탈리아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추가적인 공세는 펼치지 않았다. 이로서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패전 책임을 물어 바라티에리 총독은 전격 경질되었다. 본국의 크리스피 내각도 치욕스러운 대참패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받으며 결국 총사퇴했고, 새 내각은 전쟁의 중단을 약속하고 에티오피아와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했다.(1896. 10. 26)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우찰레 조약의 폐기를 인정하고,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 경계선을 재조정하였으며, 포로 석방을 위해 1,000만 리라를 에티오피아에 지불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더 이상 식민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유럽의 환자 오스만 제국을 대상으로 겨우 리비아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차 전쟁이 끝나고 4년 후 다시 한 번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삼고자 전쟁을 일으키고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탈리아의 패배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웹에서는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라 하여 이탈리아군의 무능을 비웃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1895년, 에티오피아 아도와 전투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orz.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웹에서 돌아다니는 글에서는 문단이 나뉘어 있지만 실은 둘 다 같은 아도와 전투의 내용이다. 우선, 에티오피아군 전사자는 최대 7천에 달할 정도이며 웹상에서 말하는 1,000명 규모는 아니었다. 그리고 기관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졌다고 하지만 20세기에 등장한 돌격기관총도 아닌 이상 기관총을 공세용으로 사용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고, 이탈리아군은 전투 초기 공세측이었다. 그리고 기관총은 사실 에티오피아군도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 투입된 이탈리아군은 패배가 확정적인 가운데에서도 동료들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대부분 결사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부대가 와해되어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여단장이 직접 총과 칼을 들고 싸우다 전사할 정도로 고군분투했다. 바라티에리 총독의 무리한 공세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아도와 전투 이전에는 성공적으로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고 애당초 아도와 전투는 전쟁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무능한 본국 내각의 강요에 의해 발생했음을 참작해야 한다.

아도와 전투같은 참패는 당대 최강 영국도 줄루 전쟁에서 여러 차례 겪었지만 아무도 영국군이 졸전했다고 비웃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영국은 충분한 대군을 파병하여 한두 번의 참패를 이겨냈지만, 이탈리아는 증원병력 하나 제대로 보내주지도 않으면서 현지 지휘관에게 닥돌하라고 지시했다. 애당초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때의 교훈을 아주 잘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