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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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다른이름 은보 (恩步)
출생 1938년 12월 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제시
사망 2010년 9월 2일 (72세)
학력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명예박사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 명예박사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대학원 목회학 박사
캘빈신학교대학원 신학 석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성균관대학교 영문학 학사
직업 개신교 목사
종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배우자 김경순 사모
웹사이트 http://johnoak.sarang.org

옥한흠(玉漢欽)은 대한민국의 종교인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목사이다. 국내 초대형교회 중 하나인 사랑의교회의 창립자이다. 당초 교계에서 평신도 제자훈련을 도입하여 국내 교회에 확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옥한흠의 생전 설교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그는 4대 전통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학교에 재학하였으며 후에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자퇴를 하였다. 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야간, 총회신학교(지금의 총신대학교) 신대원 등에서 공부하고 은평교회, 성도교회, 내수동교회에서 사역자로 섬기었다. 그러던 중 제자훈련에 대해 확실한 신학적 증거와 자신이 사활을 걸 이유를 찾겠다며 돌연 미국 유학을 떠난다. 칼빈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즈큉의 《교회론》이라는 책을 통해 답을 얻고 국내로 돌아와 1978년 현재 사랑의교회의 전신인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하고 1981년 사랑의교회로 개칭한다. 사랑의교회를 담임하면서 폭발적인 전도와 제자훈련, 후에 임기보다 5년 이른 은퇴 등으로 교계에서는 매우 인정받는 목사로써 활동하였다. 은퇴 이후 본인이 사역하던 교회에만 너무 집중하였다는 생각에 한국 기독교 전반에 걸친 개혁과 혁신을 외치며 사역을 하다 2010년 암으로 사망한다.

사랑의교회[편집 | 원본 편집]

사랑의교회는 옥한흠이 개척한 교회이자 그의 신학 그 자체였듯이, 그가 사랑의교회를 향해 사활을 걸었음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한 그의 열정이 그의 모든 진을 빼놓았고 결국 2006년 폐암 진단을 받았고 2010년 사망하였다. 사랑의교회가 강남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매우 많은 성도 수에도 불구하고 절약과 검소를 외치며 본인부터 그렇게 살았고 성도들에게도 이를 따르기를 요청하였다. 이후 은퇴에 있어서도 임기를 5년 남기고 조기은퇴를 하는 등 교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모범적으로 살도록 노력했고,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라는 설문에서 한경직 목사, 조용기 목사 등을 제치고 1위를 하였다. 큰 교회임에도 절약과 검소를 중요시한 점, 윤리 도덕적 문제가 없었던 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길러내려 하였던 점 등에서 큰 평가를 받아왔다.

은퇴 이후의 한국 개신교회 비판과 개혁[편집 | 원본 편집]

은퇴 이후에는 장로교단 최대교회의 설립자겸 원로목사로써 한국교회를 향해 많은 질타와 개혁의 주장을 해왔다.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등 다양한 협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개신교회 세속화와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며 개혁을 위해 힘써왔다. 그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은퇴 이후, 이어서 현재까지 그의 거의 유일한 실수로 꼽히는 것이 후임자 선택이다. 본인은 검소와 절약을 외쳐왔던 것과 달리 후임인 오정현 목사는 국내 최대의 예배당 건설이나 논문표절, 설교표절, 금전적 비리 등 수 많은 문제들을 일삼아 교계와 사회로부터 수 많은 질타를 받고 있으며, 옥한흠 목사가 목회를 넘겨준 사랑의 교회마저도 두 쪽을 내버리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다. 각종 고소미는 덤.

목회관[편집 | 원본 편집]

평신도 제자교육[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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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