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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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範植.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71년 7월 23일 충청도 괴산군 일도면 동부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서 부친 홍승목(洪承穆)과 모친 해평 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로, 당대 조선의 정치계에서 활약하던 노론 명문가였다. 조부 홍우길(洪祐吉)은 공조판서, 의정부 좌찬성, 함경도관찰사,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으며, 사망 후 효문공(孝文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친 홍승목 역시 출세를 거듭하여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궁내부 특진관, 장례원 소경, 봉상시 제조, 문헌비고(文獻備考) 교정 당상, 이조·병조 참의 등을 지냈다.

홍범식은 평소 겸손하고 부모에 대한 예가 지극하였으며, 본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장성한 후까지 입에서 시가를 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자신의 문집인 담원문록(薝園文錄)에 홍범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공은 타고 나기를 인자하여 어미가 자식 어루만지듯 하여 아낙네 같았건만, 의롭지 못한 사람은 용납하지 않았고, 의로운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 사모하는 마음이 독실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죽도록 애통해 하고 사모함이 처음과 끝이 같았다. 첨사공(홍승목)을 곁에서 모실 때 무엇이건 그의 뜻에 순종하며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간혹 일이 있어 슬그머니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도 공이 들어주지 아니하면 자신은 민망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다가 그치기를 여러 번하여 첨사공이 가끔 감동하여 그 말에 따르기도 하였다.그 밖에도 여러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일가붙이를 구휼하였으며, 벼슬에 있는 동안 기록할 만한 치적이 많으나 그에 있어서는 하찮은 것이라서 모두 다 기록하지 않는다.

또한 김택영은 홍범식이 '효성이 지극하였고,사람을 대함에 성품이 두터웠다'고 평가했으며, 박은식은 그를 '효제(孝悌)를 두터이 행하고 지조(志節)을 지키기에 힘썼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높은 평가를 받은 그는 18세이던 1888년 3월, 무자 식년시 진사시에 3등 232위로 급제하였다. 금위영에서 치러진 이 시험에서 진사는 324명이 뽑혔으므로, 그는 중하위의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1902년 내부주사에 선임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곧 혜민원 참서관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1904년 초 의정부의 관원 폐지 조치 때 혁파되어 내부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는 한동안 이 자리에서 계속 있었다. 1906년 1월 19일 덕릉, 안릉, 지릉, 숙릉, 순릉, 정릉, 화릉의 비각을 영건(營建)하고 표석을 세울 때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는데, 6품이었던 그는 이날 정 3품으로 승관했다. 이후 홍범식은 1907년 8월 19일 주임관 4등의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크게 일어났고, 전라지역은 의병 활동이 더욱 왕성한 곳이었다. 따라서 군수들은 현지 부임을 꺼리는 형편이었는데, 이해 12월에는 전국에 비어 있는 군수 자리가 80여 곳이나 될 정도였다. 내부에서는 이 같은 사정을 우려하여 시급히 군수를 서임하려고 하였고,한편에서는 이 기회를 틈타 군수를 희망하는 자들의 구관 행위가 있었다. 또한 당시는 지방 관리들의 탐학이 성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많았다.

홍범식은 이에 비분강개하여 선비로서 관리가 되어 어려운 때라 하여 회피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한 필의 말에 올라 동자 1명만을 데리고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며 일본인 수비대장을 만나 그 부하들이 함부로 백성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하였다.이로 인해 태인 사람 가운데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고,다른 지방 사람으로서 무고하게 붙잡힌 사람들도 많이 구하였다.

그는 평소에 받는 봉급 외에는 단 1전도 백성들에게 거두지 않았으며 황정(荒政: 흉년 때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치)이나 수리사업 등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일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이에 감복한 태인 군민들은 군내 38방에 목비를 세워 그의 덕을 칭송하였는데, 근방의 고부와 정읍군 등지에도 그를 기리는 목비를 세운 곳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시켜 경내의 목비를 거둬 오게 한 뒤 불태웠다.

홍범식이 태인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베푼 선정은 이를 칭송하는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신문에 낸 광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가 부임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08년 6월 20일, 태인군 산외면에 거주하는 이희봉(李喜鳳), 송상연(宋象衍), 이민로(李玟魯) 등은 홍범식 군수를 칭송하는 광고를 황성신문 에 게재하였다. 그들은 먼저 홍범식이 부임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으나 정령을 공평하게 펴기에 힘써 크고 작은 폐단을 없애고 오로지 밤낮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어 태안군의 산내면과 산외면은 험준한 지역이라 1907년 겨울이래 의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홍범식의 군민에 대한 무마와 일본 기병대와의 교섭으로 10여 명의 피체자 생명을 구하고, 수많은 다른 면 백성들의 생명도 구하였다고 칭송하였다.따라서 ‘이런 군수는 태인군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극찬했다.

이듬해(1909년) 5월 13일, 태인군 거주 유종규(柳鍾奎)가 황성신문에 낸 광고는 홍범식이 태인 군수를 사임하고 상경하려다가 군민들의 간청으로 포기하였던 적이 있음을 알려준다. 유종규는 홍범식이 군수로 부임한 지 3년째를 맞아 그의 열성적 노력으로 관내가 편안해졌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홍 군수가 상경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때 면장과 군민들은 홍범식에게 만일 군수가 백성을 버리고 상경하면 면장들도 모두 돌아갈 것이고 군민들은 살만한 곳을 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호소하며 만류할 것을 청원하였다. 홍범식은 이 같은 군민들의 소망을 차마 떨치지 못하고 상경하기를 그만두었는데, 유종규는 홍범식에게 '감하(感賀)'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광고를 냈던 것이다.

홍범식은 태인군수로 약 2년을 재직한 후 1909년 6월 14일 금산군수로 전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태인에서와 같이 선정을 베풀기에 힘썼다. 송상도기려수필에 따르면, 금산의 치소 남쪽에는 예로부터 연병장이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지되어 그곳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수백 두씩 수확하고 또한 매매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의 군수 김우식(金宇植)이 부훈(府訓)에 의해 모두 국유화 시켜 버렸다. 홍범식이 부임하자 그곳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이 사실을 호소하였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홍범식은 사실에 입각하여 상부에 보고하여 모두 돌려주니 모든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일제가 일진회를 앞세워 한국을 병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깊이 탄식했다.

안타깝다. 내가 백 리의 땅은 지켜냈으나 나라가 망하는 것은 지켜낼 힘이 없구나. 나라가 망한다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장차 국가에 변고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그의 부자와 친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고,한편으로는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하였지만 아무도 그의 자결 조짐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러던 1910년 8월 29일, 결국 그는 망국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있다가 자결을 결심한 뒤 날이 어스름해지자 재판소 서기 김지섭(金祉燮)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유서를 넣어 단단히 싸서 봉한 상자를 그에게 건넸다. 김지섭이 이를 열어 보려 하자 그는 열지 말고 그냥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김지섭은 군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냥 품에 넣어 집으로 가지고 갔다.

잠시 후 홍범식은 소실(小室)에게 어찌 놀러 나가지도 않느냐고 묻고, 그녀를 데리고 고을의 잘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보내고는 주인에게 관아의 창고를 수리해야 하기 때문에 소실을 잠시 머물도록 폐를 끼쳐야 하니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곧 그 집을 떠났다.이때 사령(使令)인 은성(殷成)이 그를 따랐는데, 홍범식이 그 집을 나서서 여느 때 다니지 않던 길로 접어들자 그는 혼잣말로 이 길은 객사로 가는 길인데 왜 군수가 이 길로 갈까라고 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객사에 도착한 홍범식은 은성을 문밖에 있게 한 뒤 안으로 들어가 임금께 북향사배(北向四拜)를 올리고 나와 아래채에 이르러 비단으로 목을 매어 자결을 시도했다. 은성이 몰래 들어가 엿보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놀라 그에게 달려가 얼싸 안으며 울부짖었다. 홍범식은 노하여 은성을 손으로 밀어제치고 옷자락을 걷어 치며 결연히 나가 버렸다. 이에 은성이 소리쳐 울면서 그의 뒤를 따랐는데, 홍범식은 문밖으로 몇 발자국 나가다가 몸을 돌려 모래를 집어 은성의 얼굴에 뿌렸다. 갑자기 눈에 모래가 들어간 은성이 눈을 뜨지 못하고 눈을 비비는 사이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은성은 관아로 달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군수가 목을 매 자결하려는 것을 풀어드렸으나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니 빨리 횃불을 들고 찾아 달라고 울부짖었다.이 소식을 들은 아전과 군민 모두가 놀라 군수를 찾아 나섰다. 한편, 군수로부터 상자를 받아 가지고 집으로 들아 온 김지섭은 처음에는 군수가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열어보지 말라고 한 것이라 여겨 의심하지 않았었다. 김지섭이 집에 돌아와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그 아들에게 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또한 지섭에게 주는 편지도 있었는데, 홍범식은 이 편지에서 지섭에게 나라가 망하였으니 자신은 자결하면 그만이지만 너는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당부하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이에 놀란 김지섭은 관아로 달려가니 군수는 이미 없었다. 어떤 사람의 안내로 홍범식이 소실을 맡긴 집을 찾아가 물어보니 곧바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지섭이 홀로 한숨을 쉬며 골목을 나서 바라다보니 불빛이 군청을 밝히고 한창 술렁거리고 있었다. 지섭이 서둘러 달려가니 은성이 아전과 고을 사람들을 모아 군수를 찾아 나서려는 참이었다. 지섭은 그들과 함께 객사로 가서 군수를 찾아 나섰는데, 문 옆의 밭에 수숫대와 옥수숫대가 헤쳐지고 꺾여 마치 사람이 뚫고 들어간 흔적 같아서 모두 의심하며 온 밭을 두루 뒤졌으나 헛일이었다.

이때 갑자기 뒤쪽에서 원님이 여기 계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달려가 홍범식을 찾아냈으나,그는 객사 후원의 낮은 소나무 가지에 목매 숨이 끊어진 뒤였다.나뭇가지가 연약하여 처져서 그의 몸은 땅에 비스듬히 늘어져 마치 누워 자는 듯 한 모습이었다.홍범식은 평상시에는 서양제 검은 모자를 썼는데, 이날은 우리 의관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는 이날 아침 작년에 남에게 빌려 온 매화 분재를 편지와 함께 30리 길을 달려가 돌려주게 하였는데,심부름꾼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금산군에서는 아전과 어른들로부터 비롯하여 아래로는 농군,등짐장수, 아낙네,어린애 할 것 없이 모두 앞 다투어 나와 울고 또 장례 모실 준비에 분주하였다.아들 홍명희가 달려왔을 때 이미 모든 장례 준비가 갖춰진 뒤였다. 그의 염을 마친 뒤 남은 수의용 옷감이 십여 필이 되었는데, 모두들 울며 변변치 못한 것이나마 백성들의 정성으로 모은 것이니 원님 몸 옆에 함께 넣어 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애원하자 모두 관 속에 넣어주었다. 상여가 떠나려 하자 온 고을 사람들이 몰려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고, 모두 도로에 나와 울며 곡을 하였다. 상여가 괴산의선영까지 가려면 3백리나 되는데도 아전과 백성 1백 명이 상여를 따라가 장례를 마치고야 돌아왔다.

홍범식은 자결 직전 객사의 벽에 "국파군망 불사무위(國破君亡 不死何爲: 나라가 망하고 임금도 없어졌는데 죽지 아니하면 어찌할꼬)"라는 여덟 자의 유서를 남겼다. 홍범식의 품안에 지니고 있던 유서는 염탐꾼이 뒤져 가져갔지만, 일제는 김지섭에게 부탁한 유서의 존재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섭은 이 유서들을 잘 숨겨두었다가 명희에게 전해 주었다. 유서는 할머니와 부모로부터 부인과 자제,며느리와 딸에게 이르기까지 십여 통이나 되었다. 그는 이 유서에서 식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또한 손자 기문은 어렸으나 나중에 성장한 다음에 읽어보라고 하며 그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 내용은 손자 기문에게 입신양명하여 자신의 유한을 달래달라고 부탁하며, 몇 종형제가 되더라도 돌려서 읽어 보라고 명하였다. 유서의 글자는 모두 흐려 쓰지 않고 정성을 들여 또박또박 썼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홍범식의 주머니에는 5통의 유서가 있었는데, 일제가 뒤져 가져간 것을 후에 박용태가 일본인에게 사정하여 가족에게 남긴 유서 1통을 돌려받았다고 한다.나중에 홍범식의 가족들이 그의 유품 중에서 오래된 상자를 열어보니 멸망한 고려 왕조에 충성과 의리를 다하기 위해 은거한 두문동 72현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 나왔다고 한다. 그가 아들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에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1999년

홍명희는 후에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합방만도 마음이 약하고 몸이 약한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크나큰 타격인데 약한 마음을 자애로 어루만져주시고 약한 몸을 자애로 휩싸주던 우리 아버지가 합방 통에 돌아가셨다. 나는 온 세상이 별안간 칠통 속으로 들어간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天崩地坼이란 當故한 사람들 흔히 쓰는 문자가 나에게는 문자 그대로 사실인 듯하였다.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하고 또 내 자신이 망하였으니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는 것이 가장 상책일 줄 믿으면서도 생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다. 죽지 못하여 살려고 하니 고향이 싫고 고국이 싫었다. 멀리멀리 하늘 끝까지 방랑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삼년을 지내는 동안에 겉으로 생활은 전과 같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지만 속으로 감정은 전과 딴판 달라져서 모든 물건이 하치않고 모든 사람이 밉살스럽고 모든 예법이 가소로웠다.

- 홍명희, '내가 겪은 합방 당시', 서울신문 1946년 8월 27일자 기사.

그러나 홍범식의 부친 홍승목은 1906년 11월부터 중추원 찬의를 지냈고, 한일병합 때까지 여러 친일 성향 단체의 임원을 지냈다. 심지어 아들 홍범식이 한일병합 소식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뒤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일제에 충성을 바쳐 1921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내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헌 직원록>에 의하면 그는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 직할기구인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었고, 1911년부터 연수당 1000을 받았으며, 1914년에는 공훈 등급 정5를 받았다가, 1919년에는 종4로 승훈이 되었고,1921년에는 종4 훈4의 공훈을 부여받는 등 1925년 죽기 직전까지 일제에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범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