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수 (1881년)

崔明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12월 22일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 도원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도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충남 목천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김동삼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헌병과장, 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8년 8월에는 3부(正義府·參議府·新民府)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해 시국 문제를 논의했지만 각 단체간 갈등이 심해지자 퇴장했다.

그후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하이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된 뒤 1935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재차 중국으로 망명했고, 1951년 11월 18일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명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2019년 2월 27일, 대한민국 법무부는 최명수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국적 증서를 수여했다.[1]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