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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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玉. 이명은 김한복(金漢福)·김두산(金斗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5년 12월 8일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하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당할 때 문경에서 일어난 의병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혔고, 1910년에 방면되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승훈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그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와 접촉하고, 군자금 모집의 특수사명을 띠고 다시 국내로 잠입하였다. 1919년 7월 신덕영으로부터 권총 두자루와 독립선언서·독립신문을 받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해 12월까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1,500여원을 마련, 임시정부에 송금한 뒤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22년 4월 14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1922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2] 한편 1923년 1월 27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임종룡(任鍾龍), 박병한, 홍승욱, 박노동(朴魯東), 김병태(金秉泰), 전상준(全相俊), 권면상 등이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부호로부터 자금을 받아낸 일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으나,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면소되었다.[3]

출옥 후 공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인옥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