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 貞明公主 |
|
---|---|
인물 정보 | |
출생 |
1603년 6월 27일 조선 한성부 |
사망 |
1685년 9월 8일 (향년 82세)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직업 | 왕족(공주) |
종교 | 유교 |
배우자 | 영안위 홍주원 |
가족 | 아버지 선조, 어머니 인목왕후, 이복오빠 광해군, 동복남동생 영창대군, 7남 1녀 |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막내딸이자 유일한 적녀(嫡女).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하며 많은 후손을 두었지만, 그녀의 삶은 오랫동안 가시밭길이었다가 말년에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탄생[편집 | 원본 편집]
1603년 6월 27일,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첫째로 태어났다.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대신 선조는 9명의 후궁들에게서 13남 10녀를 낳았다.
의인왕후는 1600년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왕비 자리가 공석이 되면 기존의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뽑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선조는 굳이 궁 밖에서 새 왕비 후보를 물색했고, 1602년에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제남(金悌男)의 차녀가 간택되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이때 선조는 50세, 인목왕후는 18세, 김제남은 40세, 그리고 선조의 차남이자 왕세자였던 광해군은 27세였다.
인목왕후는 곧 임신하여 정명공주를 낳았다. 인목왕후의 삶에 대해 다룬 궁중소설인 <계축일기(癸丑日記)>에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광해군 세력이 무척 불안해하며 인목왕후의 복중 태아를 유산시키려고 갖가지 수작을 부렸다”, “인목왕후가 공주를 낳았는데 실수로 ‘왕자를 낳았다’고 잘못 알려지자 유자신(柳自新)[1]이 아무런 인사도 않고 있다가, 공주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야 인목왕후에게 축하 인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계축일기>는 일방적으로 인목왕후를 옹호하고 광해군을 악역으로 묘사하는 편파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분명 서자인 광해군에게 자신보다도 어린 적모(嫡母)의 임신은, 특히 ‘여동생’이 아닌 ‘남동생’의 탄생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비록 공주였지만 늦둥이에 첫 왕비 소생 자녀라서, 아버지 선조는 정명공주를 무척 사랑했다. 애초에 왕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여동생인지라, 광해군도 그녀를 마음껏 예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동생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3년 후인 1606년, 인목왕후는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막내아들이지만 유일한 적자(嫡子)였다.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신하들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인목왕후 역시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이 아이를 ‘세자’라고 불러야 합니까, ‘대군’으로 불러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영창대군의 의복을 세자처럼 입혔으며, 중궁전 소속 시종들이 자신의 위세를 믿고 동궁전 시종들을 방자하게 대해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또한 아직 어린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에게 규정보다 더 많은 재산과 시종을 주었으며, 한미했던 연안 김씨 가문은 인목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이후부터 부와 권세를 누렸다. 광해군과 대북으로서는 신경이 쓰였다. <계축일기>에서는 “광해군은 정명공주를 예뻐했지만 영창대군에게는 서먹서먹하게 대해서, 영창대군이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며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으로서는 다행히도) 선조는 미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56세에 세상을 떠났고, 광해군이 대를 이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정명공주는 5세, 남동생 영창대군은 2세였다.
계축옥사[편집 | 원본 편집]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연안 김씨 일가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와 ‘의인왕후의 묘지와 공빈 김씨(恭嬪金氏)[2]의 묘지에서 광해군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외삼촌 김내(金琜)ㆍ김규(金珪)[3]ㆍ김선(金瑄), 이모부 심정세(沈挺世)는 처형되었고, 외할머니 광주 노씨(光州盧氏)는 유배되었다.
7세였던 영창대군도 어머니 인목왕후와 떨어져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614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방에 가두어놓고 아궁이에 불을 잔뜩 지펴서 죽게 했다는 설, 독극물을 먹여 죽였다는 설 등등이 전해진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서궁(西宮)[4]에 유폐되었고, 10년 동안이나 불안하고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정명공주는 천연두에 걸렸다가 겨우 회복되기도 했다. 서궁 생활 당시 그녀는 10대로 결혼할 나이였으나, 유폐되어 있는 처지 때문에 결혼 준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인조반정[편집 | 원본 편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삶에도 다시 빛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반정 세력에 의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된 능양군(綾陽君)은 선조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5남인 정원군(定遠君)[5]의 장남으로, 나이는 정명공주보다 8살이나 많지만 정명공주와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 또한 능양군은 정명공주의 이모부 심정세의 이종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능양군(인조)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를 폐하고 (남)동생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했으므로, 반정의 명분인 할머니 인목왕후와 고모 정명공주를 각별히 받들었다. 우선 정명공주의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 그녀는 20세로 혼기를 한참 놓친 나이였기에, 어렵사리 3살 연하의 홍주원(洪柱元)을 신랑으로 간택했다. 본래 홍주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3년상을 치르느라 결혼을 미루고 있었는데, 왕실에서는 홍주원을 파혼시키고 정명공주와 결혼시켰다. 인조는 정명공주와 홍주원에게 대저택과 수많은 재산을 주었으며, 인목왕후는 사위에게 어구마(御廏馬)[6]를 하사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리고 홍주원은 처가(왕실)의 지원과 부마라는 지위를 배경으로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
이렇듯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마저도 무릅쓰고서 정명공주에게 특혜를 베풀었으나, 인목왕후가 사망한 이후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정명공주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정명공주는 서궁 유폐 시절 못지않게 30~40대를 불안한 마음으로 보냈다. 잘못하다간 자칫 자신뿐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과 시가까지도 화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절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소녀 시절부터 특기였던 서예도 그만두고, 여느 여염집 여인들처럼 가사와 육아에만 몰두하며 지냈다. 인조,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 즉위 후에야 정명공주는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결혼과 자손[편집 | 원본 편집]
풍산 홍씨(豐山洪氏) 가문의 아들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낳았다. 3남 홍만형(洪萬衡)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고모부이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와 정조의 신하 홍국영(洪國榮)도 정명공주의 후손이다.
서예[편집 | 원본 편집]
아버지 선조와 어머니 인목왕후를 닮아, 서예에 특기가 있었다. 서궁 유폐 시절에 정명공주는 서예로써 마음을 달래고 인목왕후를 위로했다. 그녀의 서예 작품으로 전해오는 ‘화정(華政)’은 가로와 세로가 약 73cm나 되는 크고 아름다운 글자로 명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