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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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南均.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3월 5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장용리(현 약산면 장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3일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왕재일·장재성)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했다. 성진회의 운영은 월 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 동지포섭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12927년 3월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생기자, 회원들은 정남균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성진회를 해체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1927년 3월 졸업한 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하던 그는 도중에 체포되어 1928년 12월 7일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벌금 20원, 환형유치일수 20일 판결을 받았다.[1]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 발발 후 성진회 활동과 관련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4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았다.[2] 이에 불복해 공소하였고,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3]이후 완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남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