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圭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2월 9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학암마을에서 낭주 최씨 최원묵(崔原黙)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13대조 최진하(崔鎭河)가 구림에 세거지를 마련한 이래 구림 일대에서 대표적인 4대 성씨로 이름난 명문가였다. 구림은 호남의 대표적인 향약인 구림대동계(鳩林大同契)가 조직된 곳으로, 대동계의 회합장소 회사정(會社亭)을 비롯해서 낭주 최씨의 국암사(國巖寺), 호은정(湖隱亭), 함양 박씨 사우 죽정서원(竹亭書院), 해주 최씨의 동계정(東溪亭), 연주 현씨의 죽림정(竹林亭) 등 수백년 간 사원이나 문중 사우가 세워졌다. 그는 이러한 집안에서 5대 독자로서 엄격한 훈육 속에서 자랐으며, 다섯 살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1918년 4월 구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4월 10일 구림에서 3.1 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을 때 구림보통학교 교정에서 시위대가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일로 인해 학교가 당국의 탄압을 받아 폐교 위기를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도 1922년 3월 무사히 졸업하였고, 구림학우회, 영암청년회, 영암청소년회 등에 참여하여 영암일대 소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구림학교 졸업으론 입학자격이 주어지지 않아서, 광주청년회가 운영하는 광주청년학관 고등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다닌 뒤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성공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1회 졸업생 최동문의 집에 하숙하면서 정구[1]부에서 활동하며 다수의 전남 출신 청년들과 교류했다. 최규창은 광주에 올라온 후에도 영암 출신 학생들과 함께 각종 강습회, 운동회, 야유회 등을 가지며 친교를 유지했다.
최규창이 1925년 광주고보에 입학할 당시 학교에는 시라이(白井規一) 교장, 하세가와 아사히(長谷川旭), 시게루 가토타(門田四郞), 유조 나카지마(中島友三郞), 오자와 신타(大澤正太郞), 마사키 미키(三木正枝), 하야카와(早川黙翁), 요시다 긴자키(吉田金造), 오카다 요시타카(岡田嘉高) 등 12명의 일본 교사가 있었다. 이듬해에는 동경제대 출신 와타나베 미요시(渡邊三吉)가 교사로 왔는데, 3년 뒤엔 교감이 된다. 당시 조선인 교사는 한문 촉탁교사 송홍(宋鴻)이 유일했다. 광주고보생들은 1925년 동조동근론이나 수업시간에 조선역사나 조선민족을 차별한 교사들에 대한 배척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1928년 광주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의 배경이 되었다. 1926년 광주에는 청년운동이 활발했다. 광주청년회, 광주노동공제회, 해방운동자동맹, 전남청년연맹, 광주신우회, 광주여자청년회, 광주소년회, 광주점원청년회, 광주형평청년회(1926.2), 광주기독청년회(1921), 인쇄직공조합, 자유노동조합, 광주이발사직공조합,정미노동조합, 광주철공조합,광주면소작인회 등 청년조직이 활동했다. 최규창은 자연히 이 청년조직에 자주 들락거리며 그들로부터 사회주의를 전수받았다.
1926년 11월 당시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자신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 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최규창의 하숙집이던 진남여관(鎭南旅館)은 부동정 부근 광주천변 소로에서 조금 들어간 샛길에 들어선 집이었다. 하숙집 앞은 아름드리 거목 두 그루가 있었다. 성진회 창립 장소로 이곳이 정해진 것은 신문배달을 하던 왕재일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왕재일은 신문배달원으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기숙사나 하숙집을 돌며 친분을 쌓고, 시국대담을 하면서 항일청년들을 포섭했다. 성진회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했다.
그러나 1927년 1월 회원 중 이반자 문제가 발생해 활동을 돌연 중단했다. 장재성과 왕재일 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해 2월 설날을 맞아 성진회의 해체를 타진했다. 결국 성진회는 창립 5개월 만인 1927년 3월 위장 해체되었다. 하지만 성진회 활동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장재성, 왕재일 등이 졸업한 뒤, 성진회 재학생 그룹이던 최규창, 임주홍 등이 이 단체를 이끌었다. 최규창은 성진회 멤버인 임주홍, 정우채 외에도 광주사범학교 재학생 이동선, 하의철, 광주농업의 유치오, 유상걸 등과 교류했다. 그 배후에는 광주청년회와 광주청년연맹 간부 강해석, 지용수, 장석천 등이 있었다. 그러던 1928년 6월 9일,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들은 동교생 이경채의 퇴학을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학교 측은 항의하는 학생들을 무기정학하고, 6월 19일에는 17명을 퇴학시켰다. 이에 6월 25일 5학년생 김영찬(金永燦)의 누문동 집에 모인 학생대표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최규창도 여기에 가담하여 학교 당국과 대결했다.
학교 당국은 6월 26일 김영찬, 정동화, 변진설 등 27명을 퇴학시켰고, 이만동, 서재호, 김기권, 박세영 등 281명을 무기정학시키고, 최규창, 임주홍 등을 임시정학시켰다. 이 과정에서 학부형들은 수습파와 맹휴 옹호파로 양분된다. 이들은 학교측과 교섭을 추진하지만 학교 측의 거부로 무산되고 말았다. 7월 10일 20여명의 학생들은 맹휴중앙본부를 최규창 하숙집에서 결성했다.33) 정동화, 김부득, 서재호, 박세영, 이만동, 최창진, 최규창 등은 맹휴를 항일운동으로 확대했다. 광주고보 맹휴소식을 들은 재동경광주유학회는 ‘광주고보 모교분규사건대책 강구회’를 조직하고 최동문, 김창모(金昌模), 장재성을 파견했다. 최규창은 최동문과 장재성 등에게 경위를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으며, 특히 장재성에게 맹휴의 방향을 상의했다. 장재성은 광주농교에서 맹휴를 이끈 유치오, 주당석, 광주고보 김상환, 김보섭, 임주홍, 김창주, 정우채 등을 만났다.
최규창은 동맹휴학을 지속하기 위해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간의 연계를 추진했다. 그는 정동화와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임주홍, 서재호, 박세영 등에게 등사 필기를 맡겼다. 이들은 ‘학부형 제씨에게 호소하는 글(7.16)’, 4백여 용사여’(7.20) 등의 격문으로 반일의지를 고조시켰다. 8월 2일 최규창의 집에 모인 학생들은 '맹휴중앙부'를 재구성했는데, 최규창, 임주홍, 정동화, 변진계, 이만동, 윤승현, 김기권 등 참여한다. 이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단(8.2)’, 광주고보 생도 일동 항의문(8.3)을 작성해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이를 깎아내리는 각 학교 교장에게 보냈다. 최규창, 박세영, 서재호는 대촌면 칠석마을 서재호의 집에서 ‘중앙본부 통신 경고문(8.5)’을 만들었다. 김기권, 윤승현, 박세영, 이만동, 변진계 등은 「중앙본부 경과보고」(8.20)에서 서약서 제출자를 역적으로 간주한다는 경고문을 적기도 했다. 며칠 뒤 임주홍, 정동화, 박세영, 서재호, 윤승현 등은 재차 서재호의 집에 모여 ‘중앙집행부의 상광 후의 실행요목’(8.25)라는 격문을 만들고, 여러 곳에 배포했다.
사태가 커지자 일본 경찰이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했다. 8월 22일 장재성이 배후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23일 최규창이 체포되었다. 25일 서약서 제출을 시도하는 학부형회의를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하던 임주홍이 체포되었고, 정동화, 김기권, 박세영, 이만동, 서재호와 광주청년동맹 서재익도 검거되었다. 3개월간 동맹휴학으로 구속자 16명, 퇴학자 40명, 무기정학 300명이 발생했다. 최규창은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보안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2] 이로 인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하다가 1929년 4월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영암의 서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광주사범학교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사건의 배후에 성진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성진회를 이끌었던 그를 11월 15일 영암에서 체포했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3]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여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부당한 폭력과 언동을 일삼는 간부에 맞서 정우채, 유치오, 장재성, 임주홍 등과 함께 배척운동을 전개했으며, 옥중 사망한 장진홍을 위한 추모단식농성도 전개했다.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면서 석방되었다.[4]출소 후 고향에 머물다가 동아일보 영암지국 기자로 위촉되었다. 이후 유용희, 곽명수, 김판권, 최상호 등과 함께 영암농민운동 비밀결사를 논의하다 10월 초 덕진면 영동리 하헌훈의 집에서 농민운동 상무기관 설치에 동의했다. 1932년 4월 18일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었지만, 최규창이 이 비밀결사에 가담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분명하지 않다.
1932년 봄 나주 공산면장 김상수가 영암 땅의 소작권을 신소작인에게 양도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구소작인들이 집단 항의에 나서자, 1932년 3월 13일 덕진면 운암리 청년회관에서 문사훈, 신용주, 신용점 주도로 청년 수십 명이 모여 일대 소작권이전 횡포에 맞설 대책을 의논했다. 그러자 신소작인들이 청년회를 고소했고, 청년회 영암지국장 최판옥이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소작쟁의가 중단되었지만, 최판옥이 출감되자 쟁의가 재가열되었다. 1932년 6월 3일 청년 70여 명을 포함한 농민 수백 명이 모여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한 뒤, 형제봉에서 산유회(山遊會)를 개최한 후 산을 내려와 적기를 들고 신소작권 이전을 성토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그들은 지주와 신소작인을 착아가 실력행사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청년회 멤버들이 모조리 구속되었는데, 최규창은 비밀결사인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재판은 1년간 지연되다 1933년 8월 22일로 연기되었고, 9월 14일부터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개정되었다. 이 재판은 9월 14일, 9월 15일, 16일, 17일, 22일 등의 공판을 거쳐 9월 29일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9월 15일 재판과정에서 청년회 지도자 최판옥이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모친이 떡 장사로 자신을 길렀지만 효도한 적이 없고 은혜 갚을 길도 없으니, 공산운동을 관두겠다고 밝혔다. 이에 분노한 최규창과 김판권, 유혁 등이 반론권을 요구했지만, 재판장은 거절했다. 9월 29일 결심에서는 일부 피고인이 간수를 제치고 최판옥에게 달려가 구타한 뒤 끌려가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후 최규창은 가택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5]
그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대구복심법원 재판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34년 3월 7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6]그는 이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상고서를 제출해 복심법원의 판결은 모순이 있다고 항변했다. 요지는 농민운동상무기관 설치를 합의했지만 자신은 참여한 게 아니며, 동지규합은 중도에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1934년 5월 10일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7] 결국 최규창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5년 연초에 출소하였다.
그후 고향에 칩거하며 요양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지만 흉년이 들어서 생계가 어려웠다. 강진 도암의 처가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웠기에 1935년 겨울 목포로 이주했다. 그는 처가를 통해 돈을 얻어 목포에 양복집을 차린 후, 목포, 영암, 광주를 오가며 양복을 판매했다. 1936년 광주로 올라온 뒤 조극환과 정우채 등 여러 지인의 권유를 받아들여 월간지 <호남평론>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다. 호남평론은 지역현안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고 지역소식을 전하는 공론지 역할을 하는 한편, 사회현실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하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나 매번 일제 당국의 검열로 인해 기사들이 삭제되는 등 고초를 겪다, 1937년 12월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호남평론 폐간 후, 최규창은 김철진, 현준호, 손원배 등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히 지냈다. 그러다 1939년 전남도청 내무부 지방봐 촉탁에 발탁되어 장응선(張應善), 일본인 1명과 함께 일했다. 또한 1938년 8월 27일 출범한 광주사상보국연맹에 가입했다. 사상보국연맹은 일제가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수감된 사람들을 위주로 만든 단체로, 일본정신 체득의 사명을 목표로 활동했다. 1939년 12월 3일 장성경찰서 연무장에서 광주보호관찰소 송본(松本) 관리소장과 연맹원 최규문, 최규창 등이 사상보국연맹 보고회를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8] 그 외에는 보국연맹에서 특별한 활동을 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42년 말 사상보국연맹 간부직에서 물러난 뒤 자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943년 장남 최승호를 서석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했기에, 그는 8.15 광복 때까지 조용히 지내야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광주시내 전남여고 교정에서 행정권을 전남도청으로부터 인수받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가 결성되었다. 최규창은 이 단체에 가담하여 목포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45년 9월 10일 광주시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뒤, 10월 10일 공식 출범했을 때, 그는 목포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목포 지역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한편, 그는 최인식의 권유를 받아들여 건준 전남지회 기관지 <건국특보> 제작에 참여헀다. 그러나 당시 제작된 건국특보의 내용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전남인민위원회가 광주 시내에 있는 일본계 적산 전남신보(全南新報)를 접수하여 기관지 <호남신문>을 창간하였을 때, 최규창은 호남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다.
1948년 가을 조선중앙일보로 이직한 최규창은 서울로 올라와서 신설동 부근에 살았다. 그러나 그가 조선중앙일보에서 어떤 기사를 썼는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1949년 7월 8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는데, 장남 최승호의 증언에 따르면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서울에서 화장한 뒤 고향 구림마을에 안장했다고 한다. 장남 최승호는 부친 사망 후 수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전남 지방의 대표적인 언론인이 되어 광주, 전남 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9]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최규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항일청년 최규창의 삶과 투쟁>, 김홍길, 호남사학회, 2018.[1]
각주
- ↑ 庭球. 소프트 테니스( soft tennis)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코트 중앙에 네트를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진행하는 스포츠로, 자신의 코트 안에서 라켓을 사용해 공을 상대방의 코트로 넘겨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일제강점기 시기엔 축구, 야구와 더불어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 동아일보 1939년 12월 8일자 기사 "광주사련 대표 일행 장성서 보고연설회"
- ↑ 영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