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순 (1843년)

李學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내수의 부친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43년 음력 7월 7일 충청도 공주 대장리(현재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부친 이순제와 모친 광산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자는 경실(敬實), 호는 회천(晦泉)이다. 한때 출생지가 전라도 완산군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김복한이 작성한 <회천이공학순묘비명>이 송상도기려수필에 그대로 전제되면서 생긴 문제로 보인다.

김복한은 이학순을 '완산인'이라 지칭했다. 하지만 김복한은 '전주 이씨, 완산 이씨'라는 뜻으로 '완산인'이라 한 것이며, 공주 대장리 출신임을 명확히 밝혔다. 그런데 송상도는 이학순을 완산인으로 기록했고 생애 부분에서 공주 대장리에서 출생했다는 내용은 누락했다. 이학순에 대한 연구가 없던 시기, 그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기려수필이었다. 이 때문에 국가보훈처가 처음 <이학순 공적조서>를 기록할 때 '완산 출신'으로 하였으나, 후에 수정되었다.

이학순의 가계는 이성계의 셋째 아들인 익안대군 이방의에서 시작되었다. 이학순의 선대가 충청도에 정착한 것은 이방의의 증손 이현동이 연산의 조령(현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조령리)에 은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현동은 세조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귀로는 들을 수 없고,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하며,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가 되겠다는 의미로 호를 '농맹아(聾盲啞)'라고 지었다. 이후 단종이 죽자 연산의 조령으로 내려온 뒤 대궐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는 앉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절대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현동의 후손들은 조령과 연산 지역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세거하였다. 이학순이 태어난 공주 대장리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가문이 공주 대장리에 입향한 것은 7대조 이이망 때부터였다고 한다. 7대조 이이망은 장락원첨정(掌樂院僉正), 6대조 이인재는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으나 모두 증직(贈職: 공신, 충신, 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줌.)이었다. 이후로 이학순의 가문에서 출사한 이가 없으며, 향리에서 평생 학문을 닦았다. 이학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벼슬에 오르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

그는 말년에 하늘이 만일 송나라에 복을 내리지 않았다면 내가 금화산인이 되었을 것이라며, 연산의 대명산 아래 한양촌(현재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로 이사했다. 이것은 <신선전>에 나오는 황초평(皇初平)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황초평은 "송나라에 유학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금화산에 들어가 은거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학순의 이 말은 ‘하늘이 만약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금화산인이 되겠다'는 의미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산에 들어가 은거하겠다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학순은 김장생송시열의 학통을 잇는 기호유림이었다. 그는 주자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고, <사예(四禮)>를 저술하는 등 예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송병선의 문인이 되었고, 송병선의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학순의 행장 <회천 이학순 행장>을 작성한 송규헌은 송변선의 문인이자 족질(族姪)이었다. 이학순은 스승 송병선의 위정척사 사상을 굳건히 간직했다. 그는 의리와 절의에 철저했으며,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한창일 때, 동학교도 수백 명이 이학순의 집을 찾아와 협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학순은 이에 응하지 않고 동학교도들을 엄중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은 아들 이내수에게 악형을 가했다. 이에 이학순은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고, 동학교도들은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다고 여겨 돌아갔다.

한편, 그는 연산의 사립 찬명학교 설립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는 찬명학교를 세우려는 이들이 '국학'이니 '국도를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아먹으며, 부자, 부부의 의리를 끊고 성현을 업신여기는 자들이라면서, 그들이 말하는 "애국애민"과 "개화개명"은 "난국난민"이며, "폐화폐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학교를 세우려는 이들을 미치광이와 도적으로 비유하고, 이설을 배척하고 정학을 바로잡아 "중화의 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돈암서원 내 찬명학교 설립이 예정대로 이뤄지자, 그는 각도 각읍의 향교와 서원, 그리고 태학에 학교 설립의 부당함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엣 학교는 예의를 우선했으나, 지금의 학교는 예의를 박대하고, 옛 학도는 성현을 사모했으나 지금의 학도는 성현을 헐뜯는다"며, 학교를 세우려는 이들을 사문난적이라 비판했다. 아울러 성광순척(聖狂舜跖: 성인과 광인, 순임금도척)과 훈유빙탄(薰蕕冰炭: 향내나는 풀과 구린내 나는 풀, 얼음과 숯)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돈암서원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셔 학교를 절폐시켜 중화의 도를 잃지 말고, 외국의 업신여김을 잉태하지 말자고 주장하며 유학자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급기야 찬명학교 운동복을 도끼로 찍고, 학교설립 주도자들을 꾸짖기도 했다.

송상도기려수필에 따르면, 이학순은 창명학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고 철폐운동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9년 2월 23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 찬명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상태학 및 각 도읍 향교 서원서'이며, 글을 실은 이는 이학순이었다. 이 글은 1908년 6월 20일 찬명학교 개교식날 이학순이 유학자들에게 보낸 통고문과 동일했다. 즉, 그는 통고문을 7개월이 지난 시점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한 것이다. 아마도 찬명학교가 이전하지 않자, 대중에게 찬명학교 설립의 부당성을 알리고 폐교시키기 위해 상경한 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고문이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않자, 그는 연산으로 돌아온 후 향리에서 후학을 기르는 데에 전념했다. 그러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 이후 연산 헌병대장이 그를 몇 차례 초빙하여 은사금을 수령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이학순은 다음과 같은 글을 헌병대장에게 전했다.

이학순은 조선국의 일민(逸民)이다. 불행하게도 늙은 나이에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욕을 당하였다. 한번 싸워 볼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고, 자결해 절개를 세우지도 못했으니 내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 원수의 나라에서 불의의 돈을 주지만, 의로써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시 가지고 온다면 서산에 들어가거나 동해에 빠져 죽을 것이다.

이에 헌병대는 이학순을 투옥시키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병을 앓고 있었으나 옥중에서 단식하며 헌병들을 꾸짖었다. 이에 헌병대는 아들인 이내수와 이내준에게 부친을 설득하라고 강요했지만, 두 아들도 거부했다. 일본 헌병대가 고문을 가하자, 이내준은 "나의 머리와 너의 임금의 머리를 바꾼다면 가능한 일이나, 그렇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학순은 아들들이 고문받는 걸 지켜봤지만,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부자가 절의를 지켜 죽는다면 무슨 한이 있겠느냐. 악의왕촉을 협박하자 스스로 자결했고, 왕망이 공승(龔勝)에게 벼슬을 내리자 공승은 단식하여 죽었다. 지금 원수들이 돈을 이삭순에게 주려하니, 학순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겠다.

헌병대는 이학순이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한 것을 보고 몸을 돌보라며 잠시 풀려났다. 그는 잠시 풀려난 틈을 이용해 절명시 2수를 남겼다.

今焉已矣我平生 내 생애, 이제는 모두 끝나버렸도다


君辱臣生豈曰生 임금이 욕을 당했는데 신하가 산다면 어째 생을 말하리오

當與國家同休戚 마땅히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하니

不爲夷狄苟求生 오랑캐에게 구차하게 삶을 구하지 않으리라

西山濯濯薇何在 벌거벗은 서산에 고사리가 어디 있겠는가

東海滔滔月欲生 넘실대는 동해에 달 떠오르려 하네

將死學純長一嘆 장차 죽게 될 학순이 길게 한번 탄식하노니

可憐六十八年生 68년 인생이 가련하도다.

老入狴犴不死何 늙은이가 감옥에 들어와 죽지 않으면 뭐 하겠는가


强爲俘虜苟生何 억지로 포로가 되어 구차하게 살면 무엇하리

一生一死非難事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 것 어렵지 않으나

北望吾君可奈何 북쪽 바라보니 우리 임금을 어찌할까.

1910년 음력 12월 7일, 이학순은 독을 삼키고 목숨을 끊었다. 향년 6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학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