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선수 시절

고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92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해 투타로 활약해 12년만에 학교를 우승시키는게 큰 우승에 기여한다.

좋은 활약을 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때는 팔꿈치 통증으로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는 대학교 졸업후 프로에 진출하는게 목표였지만 수능에서 점수에서 탈락한후 삼성에 입단했다.

사실 이승엽은 처음에는 투수로 지명했다. 경북고 시절에 노히트노런과 큰 활약을 바탕으로 영입했으나 고3때 팔꿈치 부상으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방출 신세를 밟는가 했더니..

그 당시 감독인 우용득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에 의해 타자로 전향했다.[1]

그 당시 1루수는 양준혁이 맡고 있었지만 우익수로 수비 위치를 변경했고 이승엽은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그 당시 성적은 2할 8푼 5리의 홈런 13개로 신인치고는 대활약을 했지만 신인왕은 같은 팀 이동수에게 넘겼다.

1996년에는 우용득이 해임되고 백인천이 부임하자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2]을 전수해 성적이 일취만창으로 성장하게 된다.[3]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홈런을 가동해 일본 진출전 2003년까지 30홈런 밑으로 친적이 없을정도로 홈런타자였다.[4]이 당시 팀의 중심타자를 맡아 팀은 가을 야구를 못가는 팀이였으나 이승엽의 활약으로 가을 야구를 맡아보았다.

그의 커리어하이 시절인 1999년에는 한국인으로써는 최초로 54홈런을 쳤는데 .[5] 이 기록 역시 2003년 이승엽에게 56홈런을 기록했다.

이 당시 이승엽의 홈런 타구를 잡기 위해 외야석에는 잠자리채가 유명했다.[6]

그러나 2000~2001년에는 타격폼 노출로 인해 조금 부진을 거듭했는데 성적이 36홈런과 39홈런이다.

외다리 타격폼 노출로 다시 타격폼 변경으로 또 다시 기록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2003년에는 0.301의 타율과 56홈런 144타점을 기록했다.

그 당시 홈런왕이였던 심정수와 대결은 야구팬들에게는 흥미진진했지만 이승엽의 승리로 끝이 났다.[7]

유독 큰 무대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이다.

KS 6차전까지 20타석에 섰으나 2안타에만 머무르고 나머지는 땅볼이나 삼진이였다. 그러나 9회말 역전 상황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동점 홈런을 날렸다!

일본 복귀 전 성적을 보면 어마무시한데 OPS가 무려 1이 넘는다. 평균 성적이 10할이 넘으면 대단한 활약이였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냉정히 말하자면 커리어의 흠집이 잡히는 시절이다.

지바 롯데 마린즈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03년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한후 FA를 선언했는데 당연히 저 실력이면 메이저리그에도 갈 실력이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일본에 입단했다.

2004년 초반에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면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나 싶었더니 5월달에는 투수에게 노출을 당해 심각한 부진을 거듭했다.

그 당시 1루수 싸움에도 밀리고 결국 수비 위치를 바꿔 좌익수로 전향했다. 시즌 후반에는 올라왔지만 그냥 평범한 수준으로 활약했다.

큰 대우를 하고 데려온 외국인 선수가 이렇게 활약하니 일본 입장도 실망감이 높였을수밖에 없었다.

2005년에는 김성근이 부임해 엄청난 훈련량으로 성적을 기대했지만 시범 경기 성적이 20타수 1안타 즉 타율이 0.05푼[8]개막전도 2군에 시작했다. 이 당시 훈련량도 상당했기 때문에 상당히 아쉬웠다.

2군에서 쉰후 다시 1군에 복귀해서 결승타를 시작해서 슬슬 명예회복을 시작하더니 결국 30홈런에 성공하게 된다.[9]

그 당시 김성근은 1군 타격코치가 아니였기 때문에 이승엽을 마음대로 훈련시킬수가 없어서 외딴곳에서 훈련을 시켰다.

이 당시 30홈런을 기록했는데 출루율이 0.315로 기록해 좀 아쉬웠던건 있었다.

이 당시 일본시리즈에서는 맹활약을 해서 일본시리즈 우승의 큰 주역이 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팀의 대우가 부람이 있었는지 계약조건에 수비를 보장한다는걸 약속하기로 했다.

이승엽 본인도 지명타자는 마음에 들지않고 좌익수로써 서고 싶지만 그 당시 외야수는 이미 포화 상태였으므로 지명타자밖에 없었다.

그 당시 성적에 비하면 엄청난 대우를 받았지만..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활약을 했지만 일본 시절에는 활약을 못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각각 커리어하이를 지냈지만 팀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참고로 여기서 타이론 우즈를 상대로 홈런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 페이스가 아쉬워 결국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을 허용해주고 만다.

2006년 성적은 41홈런 108타점을 기록했다. OPS가 1.003으로 일본 시절로 따지면 대활약을 펼쳤다.

일본 나름의 명문팀인 요미우리의 4번타자로 활약했다. 계약은 4년 30억엔에 계약을 채택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주춤하더니 30홈런은 기록했지만 중간에 2군에 갖다온 경력이 있어서 흠집이 난다.

결국 시즌후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게 되는데 주변인들은 상당히 거절했다고 한다.[10]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2007년에는 몸쪽공에 취약적인 단점으로 뽑혔다. 후반기에는 몸쪽은 아예 치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치기 시작해 30홈런은 성공했다, 결국 2008년은 1할대를 머물면서 커리어 로우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엄지손가락이 원인이라고 다들 뽑는다.

7월에 다시 복귀후 대타 신세를 면해서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했다. 이 당시 부진을 거듭해 다른 강타자로 교체를 원했으나 끝내 승선했다.

이 당시도 역시 부진했는데 중국전 끝내기를 제외하면 부진의 거듭했다.

그러나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지고있던 와중에 결승 역전 홈런을 날려 당연히 임팩트는 넘어갔고 팀은 우승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온후 최악의 타격을 보여줬는데 일본시리즈에서는 18타수 12삼진이라는 굴욕의 성적을 만들었다.

2008년 최종 성적은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 못한 8홈런을 기록하게 됐고 2009 WBC 참가는 불참 선언을 했다.

2009년 역시 부진을 거듭했는지 양아들처럼 밀어주던 하라 감독 역시 플래툰으로 기용했다. 5월초에는 3할대의 타율을 복귀했지만 또 부진을 해서 결국 플래툰을 돌린후 2군 강등후 끝내 1군에 진입을 못한다.

이 당시 포스트시즌에 엔트리에 들었지만 또 부진한 성적으로 기록했지만 팀은 우승으로 커리어 두번째로 우승 반지를 끼우게 된다.

2010년도 역시 최악의 1년을 보내고 말았다. 주전은 밀리고 역시 대타 신세로 지냈고 롤러코스터급으로 활약해 좋은 컨디션으로 활약할땐 주전으로 기용됐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적썰이 돌기 시작했는데

장훈의 말로는 다른팀 요코하마로 이적 예상을 했지만 한국은 은퇴를 예상했다.

9월초에는 복귀했으나 부진으로 대타 신세로 됐지만 그 역시도 성공하지 못해 끝내 먹튀로 전략했다.

근데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인데 그의 전성기였던 시절에는 이승엽이 유일한 희망이였다. 그 역시 일본시리즈에서 활약을 해 나름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다고 했다.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사실 이때 삼성 복귀를 원했으나 그 당시 감독에 의해 결국 일본 시절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미우리에서 끝내 방출되 오릭스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3번[11]

4월달에는 8회말에 쐐기를 박는 홈런을 날려 활약했다. 그러나 활약은 여기서 끝.

5월에는 심각한 부진을 거듭하더니 2군에 강등된후 보름에 1군 콜업했다. 그 역시 2군 효과가 있었는지 활약이 좋았다.

최종 성적은 15홈런을 기록했다. 15홈런만 보면 좋겠지만 32볼넷을 기록하는 와중에 무려 121개의 삼진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 역시 일본 시절은 끝이 좋지 못하고 한국 복귀를 했다.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한국 복귀 첫해 2012년은 전성기 시절처럼 홈런타자가 아닌 중장거리 타자로 출루형 타자로 나간다 선언했다. 4월달에는 오재영을 상대로 복귀 첫 홈런을 기록했다. 4월달에 홈런을 계속 추가해 대활약을 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MVP를 수상해 시즌 MVP,한국시리즈 MVP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은 커리어로우를 기록했는데 10년 연속 100안타 9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지만 세부 스텟은 엉망이 됐다. 2014년에는 최고령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해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잡았다. 시즌 종료후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2015년에는 개인 통산 400홈런 3600루타를 기록해 전설로 거듭했다. 그 이후는 노장의 견제를 보여줬다. 2017년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고 화려하게 은퇴했다.


각주

  1. 사실 투수도 괜찮았지만 타자 성적도 꽤 괜찮았다.
  2. 일명 다리를 들어올려서 치는 것인데 이 역시 타격폼 교정때문에 지금의 이승엽의 올수 있었던 것이였다.
  3. 타율은 3할을 기록했지만 홈런이 9개다.
  4. 1997~2003년까지 30홈런 이상의 활약을 보여줬다.
  5. 잠실 홈런왕 타이론 우즈가 42개였고 한국인으로써는 장종훈이 가지고 있었던 41개가 최대였다.
  6. 지금 같으면 응원석 쪽이 먼저 매진됐지만 이 당시 이승엽의 홈런 타구를 잡기 위해서 응원석보다 외야석이 먼저 매진이 될 정도로 유명했다.
  7. 세부 스텟으로 보면 심정수가 조금 앞서있었지만 팀이...
  8.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 오푼이
  9. 지바 롯데는 2017년 현재 30홈런 타자 배출을 못하고 있다.
  10. 일본 대타자였던 장훈도 반대했는데 이유는 수술을 하면 신경세포가 죽어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모습이다. 즉 통증만 사라질뿐이다.
  11. 커리어 최초 한자릿수 등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