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김성근(金星根, 1942년 12월 13일(실제로는 1941년 10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이자 현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다. 별명은 야신(야구의 신).[1]

야신(野神)이라 불리웠 사나이 어르신. 그러나 한화에 부임한 이후 한화에서의 삽질과 이전에 성적으로 인해 그의 덮였던 만행이 드러나 이제는 욕을 먹고 있다.

선수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재일교포 2세로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이며 1942년 일본 교토부에서 태어났다.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일본어: 金林 星根 (かねばやし せいこん))이다.[2][3] 교토 가쓰라고등학교(京都府立 桂 高等學校)에 재학 중이던 1959년, 제4회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고 고교 졸업 후 일본 사회인 야구 팀인 교토상호차량에서 뛰다가 1960년 재일교포 성인 구단 방문 경기를 하고 나서 동아대학교에 스카우트되었다. 동아대학교를 중퇴하고 대한민국 실업 야구에 투신, 1961년 교통부에 입단한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에 완전히 정착하고 기업은행의 창단 멤버가 되면서[4][5] 1969년 초까지 활동했다. 좌완 투수로 빠른 직구를 주 무기로 삼아 1961년]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 1964년 실업야구 연맹전에선 다승 공동 2위(20승 5패)에 오르는 등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 부상을 당한 후 야수로 전업했고, 1969년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6] 선수로 뛰었던 1967년 현재의 아내 오효순과 결혼하였으며, 은퇴한 후 다음 해 마산상고 감독을 맡을 무렵에 아들 김정준이 태어났다.

지도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편집 | 원본 편집]

은퇴한 후 바로 마산상고의 지휘봉을 잡아[7][8]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김성근은 기업은행 투수코치(1970년)[9] 및 감독(1971년∼1975년)[10], 충암고(1976년∼1979년), 신일고(1979년∼1981년)에서 감독을 맡았다. 1975년 제11회 아시아 선수권 때 대표팀 코치로 참가해 우승을 일궈 내어 체육 훈장 기린장을 받았고, 1977년 봉황기에서 충암고를 창단 9년 만에 전국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1년에는 화랑기에서 신일고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충암고 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조범현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백넘버를 뒷번호로 이용하는 대부분의 코칭스태프와 달리 1977년 충암고등학교를 봉황대기 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었을 때 이용했던 백넘버 38번을 OB 베어스 시절을 포함하여 현재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11][12] 하지만 예외도 있었는데,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는 백넘버 91번을 달기도 했었다.

프로 야구 지도자[편집 | 원본 편집]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은 1984년1988년 OB 베어스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등 무려 5개 팀 감독을 맡았다. 만년 하위권이었던 태평양 돌핀스(1989년, 3위)과 쌍방울 레이더스 ('96-'97, 2위-3위)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으며, 2002년 침체에 빠져 있었던 LG의 사령탑을 맡아 팀을 2002년 한국시리즈에 올려 놓고 LG 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구단 고위층과의 갈등을 빚으면서 석연치 않게 퇴진했다. LG 트윈스 비밀번호의 시작 이 사람이 생각난다. 그것도 하필 같은 구장을 쓰는 당시 LG 트윈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신바람 야구'를 슬로건으로 내건 자율 야구를 지향하는 팀이었으나, 이른바 '데이터 야구'가 팀 컬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과연? 2006년 당시 한국 프로 야구 감독으로 활동한 15년간 통산 866승(803패 43무, 승률 0.519)을 거둬 김응룡한화 이글스 감독의 1,463승(22년간, 1125패 65무)에 이은 역대 2위를 기록 중이다. 태평양, 쌍방울, LG 등에서 하위 팀을 상위로 끌어 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검증받았으나,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7년에서야 처음으로 이루었다. 현재 지도자로 활동하는 코치나 감독들 중 김경문조범현, 박종훈, 김기태 등 여러 지도자들이 현역 선수 시절에 그의 손을 거쳐 갔다. 특히 박종훈의 아들인 박윤SK 와이번스 소속이어서 아버지를 이어 2대째 손을 거쳤다.[13] 또한 그가 맡은 팀의 선수들은 시즌 중에는 물론 비 시즌 기간에도 이른바 '지옥 훈련'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훈련 량을 소화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4]성근 다이어트! 이를 바탕으로 많은 백업 요원들을 주전과 맞먹게 양성하였으며, 박정환 등의 몇몇 타 팀 방출 선수들도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부활하기도 했으며[15] 이제 송은범만 살리면 된다. 이러한 특징은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OB 베어스 (1982년~1988년)[편집 | 원본 편집]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한 이후로 그는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로 부임하였고, 1984년 시즌을 앞두고 김영덕의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1984년 후기 리그에서 OB 베어스는 롯데 자이언츠와 1위 자리를 다투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노렸으나, 전기 리그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김영덕의 '고의 패배 작전'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올라간 김영덕도 결국... 소속 팀 OB 베어스는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하였으나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OB 베어스는 긴 침체기를 걷게 되고, 1988년 시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태평양 돌핀스(1989년~1990년)와 삼성 라이온즈 (1991년~1992년)[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그는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인천 연고 팀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해 강력한 신인 투수 3인방(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의 탄탄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만년 꼴찌 팀이었던 태평양 돌핀스를 사상 첫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3연패로 스윕당해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였다.(태평양 돌핀스는 이후 정동진 감독이 재임하던 중 199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1990년에 다시 5위로 추락한 태평양 돌핀스는 그와 재계약하지 않았고, 그는 이듬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옮겼으나, 초유의 위장 오더 등 각종 구설수를 남기고 2시즌 동안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우용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 간다.

쌍방울 레이더스 (1996년~1999년)[편집 | 원본 편집]

한동화 감독의 후임 야왕 대신 야신 으로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을 맡으면서 만년 약체였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2년 연속 3위로 끌어올려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IMF 사태 여파로 모기업 쌍방울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구단이 '선수 팔기'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고 이때 팀의 주축인 박경완, 김현욱, 김기태, 조규제 등이 현금 트레이드로 타 팀으로 떠나 전력이 크게 약화된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숙식 등을 위해 본인의 사비까지 쓰며 노력했지만 쌍방울 구단의 열악한 환경 그리고 빈약한 선수층이 가진 한계에 이르러, 1998년에는 정규 시즌 6위로 마무리했고 1999년 전반기까지 팀이 최하위인 8위에 머물면서 올스타전이 끝난 날 성적 부진에 따른 분위기 쇄신이라는 이유로 해임된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9년에 최하위로 마감한 뒤 2000년에 해체되었다. 쌍방울 선수단은 신인 지명 선수들을 포함하여 2000년 SK 와이번스가 새로 창단되면서 인계되었고 그가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어 다시 인연을 맺게 된다.

LG 트윈스 (2001년~2002년)[편집 | 원본 편집]

쌍방울의 감독에서 물러나고 1999년 시즌이 끝난 후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가 다시 그를 불러들여 이듬해 2군 감독을 1시즌 동안 맡았지만, 시즌 후 코치진의 대개편 과정에서 해임되었다.[16] [17] 2001년 LG 트윈스로 옮겨 2군 감독으로 부임하였다가, 시즌 초 팀이 1승 9패에 그치자 수석코치로 1군에 올라왔다.[18] LG 트윈스 감독으로 재임하였을 때 다시 한 번 그는 LG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1년 시즌 초 LG 트윈스는 9승 1무 25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그 해 5월 16일 이광은을 경질하고 수석코치로 올라온 김성근을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는 초강수를 보였다.[19] 2001 시즌이 끝난 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2002년 시즌에는 하위 팀이었던 LG 트윈스를 정규 시즌 4위에 올려 놓으며,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와 KIA를 잇따라 꺾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준 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선수들이 지쳐 갔음에도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흐름을 보여 주며 삼성과 LG 양 팀 모두 흥미 진진한 경기를 펼쳤고, 2002년 한국시리즈는 삼성의 우승으로 끝났던 6차전까지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였고, 당시 고관절이 좋지 않았던 외야수 김재현이 대타로 나와 장타를 날리면서도 겨우 1루에 걸어가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대부분의 야구 팬들에게 역대 한국시리즈 경기 중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2002년 11월 10 대구에서 열린 6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얻어맞고 2승 4패로 밀려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20] 시즌 후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유임될 줄 알았던 그는, LG 트윈스 어윤태 사장으로부터 "김성근의 야구는 LG의 야구가 아니다"라는 혹평을 받으며, 그럼 너가 해보시든가 계약 기간(3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되어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과 어윤태 사장은 2002년 시즌 초부터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으며,[21] 당시 LG의 팀장을 맡고 있었던 아들 김정준은 “워낙 LG 구단 쪽에서 내부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선수단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성근 감독과 관련해서 구단이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을 선수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악으로 깡으로 승부에 임한 데는 그런 요소들이 작용했던 것 같다.”라며 그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22] 하지만 김성근이 LG 트윈스에서 물러난 이후 LG 트윈스는 FA 잔혹사 탈쥐효과+입쥐효과 와 함께 2012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계속 오르지 못하게 되어 비밀번호가 무려 10자리! 김성근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으며, 김기태가 감독으로 부임한 뒤 2013년이 되어서야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되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결정적인 3점 동점 홈런을 날려 김성근에게 패배를 안겼던 이승엽은 일본 진출 후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일본 사정에 익숙했던 김성근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LG 트윈스에 있는 동안 류택현최동수는 그의 손을 거치며 뒤늦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2005년~2006년)[편집 | 원본 편집]

2005년에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의 팀 타격 인스트럭터로 취임하였고, 당시 일본식 야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4년 시즌에 부진에 빠져 있던 이승엽의 개인 코치로서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조언과 도움을 받은 이승엽은 2005년에 30홈런을 기록하여 그는 이승엽이 부활하는 데 숨은 조력자가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감독 시절부터 선수들의 자세 변화, 포착과 기술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능력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1군 선수들에게도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2005년 시즌 이후에 이승엽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갔던) 2006년에는 지바의 1·2군 순회 코치로 취임해 한국 프로 야구 출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 야구 팀의 정식 코치가 되었다.

SK 와이번스 (2007년~2011년)[편집 | 원본 편집]

2006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재계약에 실패한 제자인 조범현 감독의 후임으로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태평양 돌핀스 이후 인천광역시 연고 팀을 다시 맡게 되었다. 돌아갈 감독은 돌아온다. 2006년 시즌을 6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감한 SK 와이번스는 김성근 감독 - 이만수 수석 코치 체제로 2007년 정규 시즌 페넌트레이스 1위를 기록,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초반 2연패 후 4연승으로 역스윕하며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 구단의 창단 첫 우승이자, 김성근 감독 자신도 프로 감독 재임 후 생애 첫 우승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23] 한편, 당시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투수 리오스의 투구 폼(이중 동작)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24] 이후 2008년야쿠르트로 이적한 리오스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 보크를 기록한 후,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되어 출장 정지 처분을 받고 전격 방출당했다.

2008년 9월 3일, 문학에서 열린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감독 생활 통산 1,000승을 달성하였다.

2008년 9월 21일, SK 와이번스가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였고, 2008년 10월 31일에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2007 시즌에 이어 2008년 한국시리에 다시 올라온 두산 베어스를 맞았다. 호구 왔능가? 1차전에 2:1로 패배한 이후, 4연승을 함으로써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 냈다.

2008년 11월 4일에 2009 WBC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 제의를 고사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김성근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는 지금처럼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다는 합의가 없었다. 감독들끼리 구두로만 이야기를 했지, WBC 감독을 누가 해야 하는지 KBO 측에서 문서로 밝히지도 않았다'고 해명했다.

2009년 8월 25일의 승리를 시작으로 9월 26일에 정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19연승(?!)을 거두었다. 이 기록은 기존의 삼성 라이온즈가 가지고 있던 17연승 기록을 뛰어넘은 것이며, 일본 프로 야구가 가지고 있던 기록까지 경신하면서 아시아 신기록이 되었다.

2009년 KIA 타이거즈와 맞붙게 된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경완, 김광현, 전병두, 송은범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 속출에 따른 전력 이탈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채병룡나지완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한국시리즈 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하여 3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경기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고, 8년 전 LG 트윈스의 감독을 맡았던 당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여 무너졌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의 눈물'을 SK에서 되갚았다.[25](이후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선동열 감독을 퇴진시키고 류중일 감독을 선임하였다.)

2011년 5월 4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프로야구 감독 통산 1,200승을 달성하였다.

2011년 8월 17일, 프런트와의 재계약 마찰로 인해 2011 시즌 종료 후 자진 사임할 것이라고 선언하자[26] 다음 날인 2011년 8월 18일 SK 와이번스에서 바로 경질하고[27] 뭐라고? 이만수[28] 2군 감독을 감독 대행으로 올렸다. SK 구단의 경질 통보 이후, 휴식을 위해 도일하였다가 8월 26일에 귀국하였다. 그 이후 초·중·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있는 여러 제자들의 요청으로 부산, 경남 거제, 제주도의 학교 야구부와 리틀 야구단에서 야구부 조언 겸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예전 태평양과 쌍방울에서 함께하였던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이연수 감독의 요청으로 2011년 9월 5일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성균관대학교 야구부가 전국체전에 우승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고양 원더스 (2012년~2014년)[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후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12년 2군 번외 경기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인정받아 시즌 중 원더스 구단과 재계약에 합의하였다. 그 해 원더스 출신 선수 5명이 프로로 진출했으며, 그 중 일부 선수는 방출로 인해 원더스에서 기량을 갈고 닦다가 재진입에 성공하였다. LG 트윈스에서 함께하였던 이상훈을 코치로 맞이하였다.

고양 원더스 감독 재직 동안 총 22명 선수를 프로로 진출시켰으며, 고양 원더스의 갑작스런 해체로 야인의 몸이 되었다.

한화 이글스 (2015년~2017년 5월 23일)[편집 | 원본 편집]

2014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재계약에 실패한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팬들[29]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2015년에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한 때 4위까지 올라가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 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 후 DTD하며 6위에 그쳤다. 다음 해인 2016년 리그에는 FA에 600억을 쏟아붓고도 7위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김 감독은 부임 후부터 2015년 5월 반짝 성적이 좋았을 때 빼놓고는 선수운용에 관해 계속 팬들에게 지적을 당해왔다. 6점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권혁, 박정진, 송창식 등을 계속 마운트에 올려놨고 송은범[30]은 휴식을 칼같이 지켜주면서 혹사당한 선수들은 살려조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불리우며 어깨가 제대로 아작나고 있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23일 경질을 당했다. 말이야 사의 표명의 수용이지 사실상 경질인데도 구단은 잔여 연봉을 다 준다고 한다.

통산 성적[편집 | 원본 편집]

감독[편집 | 원본 편집]

날짜 장소 소속팀 상대팀 경기 결과 결승타 승리 투수 승패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500승 1992. 6. 17 수원 삼성 태평양 7:2 김인철 967경기 50세 5개월 27일 세 번째
700승 1998. 6. 14 사직 쌍방울 롯데 4:2 김실 김기덕 1335경기 55세 6개월 2일 세 번째
1000승 2008. 9. 3 문학 SK 우리 8:0 이재원 김광현 1941경기 65세 8개월 21일 두 번째
1200승 2011. 5. 4 한밭 SK 한화 7:4 박정권 이승호 2258경기 68세 4개월 22일 두 번째

비판[편집 | 원본 편집]

일구이언[편집 | 원본 편집]

  • 고양원더스 감독시절인 2013년. 기자가 쓸만한 선수가 없다는 모 감독의 발언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없으면 키워서 써야 한다'라고 답변했다. 그런데 자신은 한화에 오자마자 유망주들을 팔아 권혁, 배영수 같은 은퇴가 멀지 않은 선수들을 사다놓고 그들을 혹사로 굴리다가 나중가서는 '쓸만한 투수가 없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혹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김응룡(당시 삼성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인터뷰 때 김성근(당시 LG 감독)을 가리키며 '무슨 야구의 신과 싸우는 줄 알았다'고 했고, 이를 들은 김성근은 '그럼 야구의 신을 이긴 당신은 뭐냐'고 답한 일화가 있다. 한마디로 김응룡 자신을 띄우기 위해 김성근을 야신이라 한 것이다.
  2. 국가대표 - 중앙일보 칼럼
  3. 김성근 까들은 김성근과 가네바야시 세이콘이라는 이중인격이 있다며 김성근을 까곤한다.
  4. 야구 팀 결단 중소기업은행에서, 동아일보 1962년 3월 11일
  5. 이때 굉장히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둥 차별이 심했다고 한다.
  6. 자신이 혹사로 인해 은퇴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혹사에 민감한 편이라고 카더라
  7. 창공에 불꽃튈 백구의 대회전 - 동아일보 1969년 10월 4일
  8. 이때 학생들의 지도중 학생이 휘두른 방망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아 앞니가 나간 일화가 있다. 물론 '내가 이렇게 정줄놓고 있다가 맞았으니 너넨 정신 똑바로 차리고 훈련 열심히 하라며' 쿨하게 넘어갔다고.
  9. 전력진단 실업야구 캠프순방 (1) 기업은행 - 동아일보 1970년 3월 19일
  10. 기은 야구팀 감독 김성근 코치 승격 - 경향신문 1970년 12월 25일
  11. SK 코칭스태프의 등번호 - 호남조은뉴스
  12. 물론 이는 절친했던 친우인 김동엽의 등번호이기 때문이라는 카더라도있다.
  13. 김성근 감독과 LG 박종훈 감독의 '3대째 인연' - 스포츠서울
  14. SK의 힘은 '지옥 가을 훈련' 《한국일보》성환희, 2009년 11월 27일.
  15. 김성근 감독, ‘제2의 재활 공장장’이 될까 - OSEN
  16. 프로야구 삼성, 코치 6명 무더기 해임 - 매일경제
  17. 왜냐하면 이때 2001년 시즌 감독으로 부임할 사람이 김응룡 이었기 때문이다.
  18. LG, 코칭스태프 대수술 - 한국일보
  19. '최악 부진' 이광은 감독 전격 해임 - 한국일보
  20. 이후 그는 경기 중 유일하게 눈물을 흘린 경기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었다고 회고했다.
  21. 프로야구 LG, 김성근 감독 전격 해임 - 연합뉴스
  22. 2002년 한국시리즈 삼성-LG - 네이버캐스트
  23. 초반 2연패 후 4연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예는 이 우승이 최초이다)
  24. 리오스, 금지약물로 무너진 야구 신화 《OSEN》 2008.06.29 10:37 작성, 2009.10.15 19:27 확인
  25. 야신, '대구의 눈물' 8년 만에 되갚다 - 마이데일리
  26. '재계약 자진 포기' 김성근호 SK, 떠나는 선장
  27. SK 김성근 감독, 결국 경질
  28. 이때부터 이만수의 별명이 인천유다가 되었다.
  29. 다만 이 팬들이 한화팬들인지 김성근 감독 개인팬들인지는 확인바람.
  30. 팬들은 송은범을 김성근 감독의 양아들 김정은범이라는 닉네님으로 불렀다.
Wikipedia-ico-48px.png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김성근 문서 14378366판에서 분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