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조선 중기(16세기)에 그린 이순신 영정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기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545년(명종 즉위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 사이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이씨로,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다. 그의 집안은 어엿한 양반 가문으로,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정3품)를 지냈으며, 5대조 이변(李邊)은 1419년(세종 1년)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정2품)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도 1480년(성종 11년)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정5품)과 병조참의(정3품)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조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서로 한미한 벼슬만 살았기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의 집안 형편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 안가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뱀밭마을(白岩里)로 이사를 갔고, 이순신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여러 아이와 더불어 놀면서 전쟁놀이를 즐겼고, 활과 화살을 즐겨 차고 다녔다.

<충무공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8살 때 원두밭에 가서 참외를 달라고 했지만 농부가 주지 않자 말을 타고 참외밭을 짓밟아 버렸고, 농부가 기겁하여 이후부터는 이순신에게 참외를 항상 줬다고 한다. 또, 이웃집 소경 아이가 와서 "아무 집에 동아를 많이 심었으니 가 따오자" 하니, 이순신이 소경 아이네 집 지붕 위에 소경 아이를 올려놓고 동아를 다 딴 후, 지붕에 버려 둔채 가버렸다고 한다.[1] 상당한 개구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성장하면서 유학을 열심히 학문을 공부하다가 20세 때인 1565년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지냈던 방진(方辰)의 딸 방수진(方守震)과 혼인했다. 방진은 무인으로서 호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자 상당한 재력가로, 이순신의 품성과 자질을 높게 평가하여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이순신은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인이 되기로 마음 먹고, 집 뒤에 위치한 방화산(芳華山)이나 집 앞의 나지막한 야산에서 무예를 연마했다. 집 앞 은행 나무 아래에서 야산을 향해 활을 쐈고, 방화산 꼭대기의 평평한 장소를 중심으로 주위의 능선을 따라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1572년(선조 5년) 8월 28세의 나이로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별과에 응시했다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던 도중 낙마하는 바람에 낙방했다. 4년 후인 1576년에 32살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했다. 합격자는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을 기록했다. 당시 시험관이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강독하게 하다 이순신에게 물었다.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 놀았다 하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답했다.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강목(자치통감 강목)에도 '임자(壬子) 6월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 있습니까? 그건 다만 꾸며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험관은 이에 크게 놀라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잘 알 수 있느냐?"고 탄복했다고 한다. 그 후 1576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東仇非堡)의 종 9푼 권관(權管)으로 부임하여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함경감사였던 이후백은 관할지역의 여러 진(鎭)을 순행하면서 훈련과 군기를 점검하였는데, 특히 변방의 각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장수들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렸다. 하지만 동구비보가 어느 보보다도 규율이 엄중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3년간 임기를 마친 이순신은 종8품의 한성 훈련원 봉사(奉事)로 승진하여 인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다. 이때 병조정랑 서익(徐益)이 자신의 친지 한 사람을 참군(參軍 : 정7품)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하자, 이순신은 단번에 거절했다.

"아래 있는 자를 까닭 없이 끌어올리면 당연히 승진되어야 할 사람이 천거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 일로 이순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신의 서녀(첩의 딸)를 그의 첩으로 주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벼슬에 갓 나온 사람으로서 어찌 권세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훈련원에 부임한 지 8개월만인 1579년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충무공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방에 옷과 이불만 두었으며, 가를 얻어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반드시 남의 양식을 담당 병사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1580년 6월 36살의 나이로 전라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종 4품)에 부임했다.

당시 전라감사 손식(孫軾)은 이순신이 상관을 우습게 알고 교만하게 군다는 잘못된 풍문을 듣고, 그에게 벌을 주어 군기를 잡으려 했다. 하루는 순시 도중 능성(綾城)에 오르게 되자 이순신을 나오라 하여 진설(陣說: 조선시대 진법을 해설한 병서)을 강독케 하였다. 순신은 침착하고 조리 있게 설명을 마쳤다. 이에 감사는 다시 진을 치는 진도(陳圖)를 그리라 명하였다. 진도 역시 정확하게 그려내자, 손식은 그제야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이순신의 손을 잡으며 “내가 잘못하였소.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소.”라고 말했다. 이후 손식은 이순신을 이전과 달리 정중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거절했다.

"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 나무는 오래된 것으로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잡목이 아닙니다."

얼마 후 성박의 뒤를 이어 새 전라좌수사가 된 이용은 성박으로부터 이순신이 상관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하들의 실적을 평가할 때 자기 관하의 5포(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 중 이순신이 맡은 발포를 가장 낮게 평가했다. 전라도 도사(都事)로 부임하고 있던 조헌(趙憲)은 이와 같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고 판단하고 항의했다.

"듣건대, 이순신의 군사 다스리는 법이 우리 도에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장수들을 그의 아래에 둘지언정, 그를 도리어 나쁘게 평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 덕분에 잘못된 보고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582년 2월 변방의 군기물을 감찰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서 전라도 수영을 살펴보러 온 서익이 훈련원 시절의 일에 앙심을 품고 이순신이 군기를 부실하게 관리한다고 보고했다. 이 일로 이순신은 1583년 5월 2년 전에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그해 121월 병조판서 이이가 이순신을 만나보고 싶어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덕수 이씨 문중의 어르신인 분을 마땅히 만나봐야겠지만, 그 분이 병조판서를 맡고 있으니 지금 찾아뵙는 건 온당치 못합니다."

1583년 10월, 예전의 상관이었던 이용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이순신을 군관으로 임명해 함께 데려갔다. 이순신은 함경도의 경원에서 남쪽으로 40리쯤 떨어진 변방 건원보(乾源堡)의 권관으로 보직되어 부임하였따. 이순신은 인근 여진족의 우두머리인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하여 미리 매복한 병사를 투입하여 사로잡았다. 그러나 북병사(北兵使)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 없이 행동했다고 주장해, 없는 일로 되어 버렸다. 이후 11월에 훈련원 참군(종 7품)이 되었으나, 1584년 1월 부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1586년 1월 탈상한 후 궁중의 말과 수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사복시(司僕侍)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고,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 종4품)로 전근되었다. 1587년 8월 녹둔도의 농토를 관리하는 둔전관을 겸임했다. 이순신은 녹둔도의 병력이 부족한 걸 염려하여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녹둔도 근방의 여진 부족 중 하나인 시전부족이 습격하였다. 당시 이순신은 병사 및 민간인들과 함께 수확하고 있었고, 군영에는 얼마 안되는 병사만 있었다. 여진족은 군영을 습격해 조선 병사 11명을 사살하고 군민 160여 명을 납치했으며, 말 15필을 약탈했다. 이에 이순신은 추격에 나서 적을 모조리 쫓아내고, 포로로 잡힌 60여 명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입었지만, 여진족 추장과 적병 3명을 목 베었다. 그러나 이일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간주하고,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이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청하자, 선조가 답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후 이순신은 이듬해 1월에 벌어진 시전부락 전투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풀려났고, 아산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냈다.그러던 1589년 1월, 비변사에서 무신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였을 때, 이순신은 이산해, 정언신으로부터 추천받았다.[2] 이후 2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광이 군관 겸 조방장으로 임명하면서, 이순신은 7년만에 벼슬길에 올랐다. 그해 11월 선전관을 겸하였고, 다시 12월에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으로 발령되었다.

그런데 정읍현감으로 부임하기 직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 이순신의 친구였던 조대중이 기생과 헤어져 눈물을 흘렸다가 누군가가 "역신 정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체포된 뒤 처형된 것이다. <충무공 행장>에 따르면, 이때 금부도사가 조대중의 집을 수색하다가 이순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금부도사는 이순신과 마주쳤을 때 혹시나 사건에 연루될까 염려하여 편지를 따로 빼내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편지를 그대로 보고하라고 답했다.

"그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것일 뿐이오. 이미 압수를 당하여 공물이 된 것을 사사로운 이유에서 빼낸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다행히 조정에서는 단순한 안부 편지로 여겨 더 문제삼지 않았고, 이순신은 별 탈 없이 정읍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어머니와 아내, 친자식 뿐만 아니라 요절한 두 형 회신, 요신의 자식들까지 모두 데려왔다. 당시 지방관리들이 식솔을 많이 거느리는 것을 남솔(濫率)이라 하여 문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자칫 트집을 잡혀 파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아이들은 부모를 잃어 오로지 내게 의지하는데 어찌 버려둘 수 있겠는가? 차라리 파직당할 지언정 저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며 함께 데려갔다.

그 후 이순신은 정읍에서 선정을 베풀다가 인근의 태인현 현감 직이 비게 되자 그곳의 업무까지 대리로 맡았다. 그가 어찌나 일을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했는지, 태인현의 백성들이 이순신을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1590년 7월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으로 제수되었지만, 정읍현감으로 부임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바꿀 수 없다는 사간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8월에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첨절제사(정3품)으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진급이 빠르다는 사간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591년 2월, 선조는 진급이 빠르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전임시키고, 다시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세웠다. 이에 사간원이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고 반대하자, 선조가 답했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사간원은 이후에도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라고 청했지만,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라며 끝까지 이순신을 밀어줬다. 그 덕분에,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으로 부임한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 전라좌수영에 속한 5포(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와 5관(순천, 보성, 낙안, 광양, 홍양)을 순시하면서 전선, 무기, 병사 등을 점검하였다. 관리에 소홀한 아전들을 잡아다 매질하였고, 성과 보를 돌아보며 시설의 허술한 데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보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해상 훈련을 철저히 하였는데, 특히 '가왜장'을 임명하고 왜군과의 수전 연습을 실전과 유사하게 수행했다. 또한 왜군을 막기 위한 신형 전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하여 1592년 4월 12일에 완성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3일 왜군이 부산진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임진왜란 초기[편집 | 원본 편집]

1592년 4월 15일, 영남 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구십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동시에 수사가 보낸 공문서에서 왜선 35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이순신은 장계를 조정에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다음날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분하고 한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고 적었다. 이후 4월 26일 조정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물길을 따라 적선을 요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그래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이 내려갈 때, 이미 일러 보내었는데, 다만 군사상 진퇴하는 것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시행하여야만 그르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먼저 적선의 많고 적음과 지나가는 섬 사이에 적병이 있나 없나를 살펴 본 뒤에 나아감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방책이지만, 만일 형세가 유리한데도 시행해야 할 것을 시행하지 않으면 기회를 크게 놓치게 되는 바,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에 있는 주장의 판단에 맡 길 따름이다. 본도는 이미 이 뜻을 알렸으니 경상도에는 공문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기회를 보아 조치하도록 하라"

즉, 가급적 함선을 모아 출진하여 왜적을 무찌르되, 이순신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일단 경상도 순변사 이일과 겸관찰사 김수, 우수사 원균 등에게 경상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처에 모이기로 약속하는 내용과 더불어 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정박해 있는 곳과 그 밖의 대책에 응할 여러 가지 기밀을 모두 회답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각 관포에 함선과 무기를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4월 27일, 조정에서 보낸 명령서가 다시 도착했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

이에 이순신은 자신에게 속한 관포에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모이라고 통보했다. 이후 원균이 경상 우수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나 전라 좌수영의 병력을 총동원해 당포 앞바다로 나와서 싸워야 한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자기 관할이 아닌 경상 해역에 출진하는 걸 고민했다. 관할 구역이 아닌 곳으로 함부로 출정했다가 반역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에 조정의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조정은 왜군을 피해 달아나는 처지라서 명령을 내릴 겨를이 없었다. 이순신은 일단 전라 우수사 이억기에게 5월 1일에 전라 좌수영에 와달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5월 3일이 되어도 경상 우수영의 전선이 오지 않았다. 이때 녹도 만호 정운이 이순신과 독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할 마음 이길 길 없습니다.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을 것입니다."

이에 이순신은 중위장 이순신(무의공)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정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출정한 이순신은 5월 5일 당포에 도착했지만 원균이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이 빨리 나오라고 독촉하자, 원균이 얼마 후 달랑 1척(...)의 판옥선만 이끌고 합류했다. 이후 기효근 등 경상 우수군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전라 좌수영의 함대와 합세했다.

이순신은 이들을 이끌고 진군하여 5월 7일 옥포에 정박한 왜군을 공격하여 적선 26척을 격침했다.(옥포 해전) 이어 합포 앞바다에서 적선 5척을 불태웠으며, 다음날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웠다. 이때 원균이 연명 장계를 올리자고 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하고 단독 장계를 올려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5월 29일 노량에 적군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고 새벽 출항한 이순신은 적선이 사천선창에 있는 걸 확인하고 6월 1일 선두에 거북선을 투입하여 맹공을 퍼부은 끝에 적선 13척을 격침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어 오랫동안 고생했다.(사천 해전)

6월 2일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당포 앞바다로 진군하여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석 12척을 모두 격침하였다.(당포 해전) 이어 그토록 기다렸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6월 4일 정오에 합류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때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리하여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전선 25척, 원균의 경상 우수영 전선 3척 등 총 51척의 함대가 집결하였다.

6월 5일 당항포로 진군하여 그곳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을 공격해 모조리 섬멸했다.(당항포 해전) 6월 7일 영등포 앞바다로 진군하다가 왜적 대선 5척과 중선 2척이 율포에서 부산 쪽으로 달아나는 걸 목격하고 즉시 추격하여 왜선 5척을 격침하고 수많은 왜병을 사살했다.(율포 해전) 이후 가덕도로 진군하였으나 왜적이 하나도 없자 당포, 미조항을 거쳐 전라좌수영으로 복귀했다. 이순신은 이 공으로 정2품 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었다.

7월 4일, 배를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를 탐문하던 중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이억기와 논의 끝에 함대 출진을 결의한 뒤 7월 6일 일시에 출항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 도착하여 전선 7척을 거느리던 원균과 합세했다. 이후 7월 7일 당포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던 중, 섬의 목동 김천손(金千孫)이 우리 함대를 바라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하였다.

"적의 대, 중, 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낮 두시 쯤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이 정보를 알리고, 7월 8일 이른 아침에 견내량으로 항해했다. 적진을 살펴보니, 대선 36척과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이 들어갔다간 서로 부딪쳐서 곤란한 지경에 처할 걸 예상했다. 또, 왜적은 형세가 불리하면 뭍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한산도 바다 한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리기로 하고, 판옥선 대여섯 척을 먼저 보내 적진을 친 뒤 후퇴하게 했다.

그러자 적선이 일제히 돛을 올려 추격했다. 이순신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했고, 왜선은 계속 추격했다. 그러다 한산도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자, 이순신은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친 뒤 일시에 진격하여 지자, 현자, 승자총통을 퍼부었다. 선두에 선 왜선 2척이 먼저 파괴되자, 왜선들은 사기가 꺾이여 물러나려 했다. 이에 조선 수군 장수와 군사들이 흥분하여 앞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니, 그 형세가 마침 바람과 우박 같았다. 이리하여 적선 47척이 침몰하고 12척이 나포되었으며, 후위에 뒤쳐져 있던 왜선 14척은 김해로 도주했다. 반면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3명, 부상자 10여 명에 불과했다.(한산도 대첩)

이틀 후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이순신은 전 함대를 이끌고 안골포로 진격해 7월 10일 왜선 40여 척을 공격했다. 당초에는 적을 유일하려 했지만 이에 넘어가지 않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채 농성하자, 여러 장수에게 번갈아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왜선을 공격하게 했다. 이리하여 적선 40여 척을 모조리 박살내고 적병 25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반면 조선 수군의 비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이었다.(안골포 해전)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정2푼 상계 정헌대부로 가자되었다.

8월 24일 왜군의 본거지가 된 부산을 공격하기로 하여 연합함대를 이끌고 출진, 부산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일본 함대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에서 맞붙어 모조리 박살냈다. 이후 9월 1일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왜군의 전선은 470여 척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바다로 나가지 않고 언덕을 의지하여 해안 진지에서 총을 쏘며 대항했다. 이에 이순신은 해안 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며 견제하면서,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총통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한 뒤 귀향하였다.(부산포 해전) 이 전투에서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1593년 2월 6일, 웅포 연안에 적선 115척이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전선 89척을 이끌고 웅포로 출진했다. 2월 8일 저녁 칠천도의 외줄포에 당도하였으나, 2월 9일과 10일에 날씨가 좋지 않아 출전을 미루고, 2월 11일 날씨가 개자 웅포로 출진하여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웅천 왜성에 버티면서 바다로 나오길 극도로 꺼렸고, 수로가 좁아서 전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7~8척이 밀물 때를 이용햐여 교대로 진입해 적선을 공격하게 했다. 2월 11일, 12일, 18일, 20일, 22일, 28일, 그리고 3월 4~6일의 7차례에 걸쳐 소모전이 이어졌고, 2월 22일에는 의병과 승병을 하선시켜 육지의 왜적을 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적은 끝까지 웅천 왜성에서 버텼고, 곧 온다던 명나라 수군이 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농민들의 파종 시기가 다가오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해 3월 10일 본진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왜선 51척이 침몰하였고, 조선 수군의 협선 4척이 좌초했다.(웅포 해전)

1593년 7월 15일 본영을 한산도로 이동시킨 이순신은 8월 15일 조정으로부터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594년 3월 초 일본 수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게 한 뒤 전라 좌수영과 경상 우수영에서 각각 10척, 전라 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출전하여 당항포에서 본진으로 귀환하려던 왜선 31척을 격침했다.(제2차 당항포 해전)

이후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이 일본과 강화 협상 중이니 교전하지 말라는 '금토패문'을 받자 항의 서한을 올렸으며, 좌의정 윤두수가 경상 우수사 원균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립한 수륙 병진 작전에 따라 1594년 10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 장문포의 왜군을 쳤지만, 왜군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서 적선 2척만 파괴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장문포 해전)

임진왜란 후기[편집 | 원본 편집]

장문포 해전 후, 일본과 명나라 간의 강화 협상이 진척을 보이면서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원균과 이순신간의 사이가 매우 악화되어서,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원균을 일컬어 '원흉(元凶)'이라 지칭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도 두 사람의 불화가 심하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선조는 "이순신이 처음에 출전하길 기피했으나 원균이 재촉하자 마지못해 출전해 공을 세웠으니, 사실 원균이 다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제시하며 원균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다.

결국 이순신이 자신을 파직하던가,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든가 양자택일하라고 상소하자, 조정은 원균을 충청병사로 삼았다. 하지만 원균은 대신들에게 로비를 끊임없이 하여 자기를 옹호하게 하였고, 선조 역시 원균이 용맹한 장수라며 계속 두둔했다. 그러던 1596년 12월, 이순신은 부하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를 불태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조좌랑 김신국이 이 보고가 허위라고 알렸고, 이로 인해 이순신에 대한 조정의 시선은 더욱 안 좋아졌다. 사실은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렸고, 이순신이 이를 그대로 알리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지만, 진작부터 이순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선조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1597년 1월 1일,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알리는 역할을 하던 요시라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오려 한다"는 정보를 전햇다. 조정은 즉각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마침 이순신은 1월 6일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고, 가토는 그 사이에 바다를 건넜다. 조정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왜적이 추가로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라고 지시했고, 이순신은 이에 따라 전선 69척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진하여 무력 시위를 한 뒤 돌아갔다.

그러던 중 가덕도에 쉬면서 물을 구하다가, 왜군이 습격하여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다. 이순신은 이에 분노하여 가덕왜성에 포격을 퍼부었고,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한 후 포로들을 돌려줬다. 그후 본영에 귀환하였으나, 원균의 모함에 넘어간 선조의 지시를 받은 금부도사에 의해 2월 25일 체포되어 통제사 직에서 해임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2차례 형신을 받으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정탁의 변호 덕분에 4월 1일 석방되었다.

그후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내려가다가, 자기를 마중하러 나온 어머니가 도중에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은 이 소식을 듣고 난중일기에 비통한 심정을 절절하게 담았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이순신은 모친상을 당하였지만 3년상을 치르는 걸 허락받지 못하고 권율의 막하에 있어야 했다. 그러다 7월 18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섬멸당하고 말았다는 참담한 소식이 접하고 통곡했다. 이후 권율이 와서 말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에 이순신이 아뢰었다.

"제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권율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하였고, 이순신은 송대립(宋大立), 류황(柳滉), 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림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알아봤다. 그러던 8월 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교유서를 가지고 와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다는 어명을 전했다. 이순신은 곧바로 통제사의 권한으로 여러 고을의 무기를 확보하고 패잔병들을 수습하는 한편, 남아있는 전선의 행방을 찾았다. 이윽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즉시 인수하였다.

그러나 전선 12척으로 왜선 수백 척을 막는다는 건 누가 봐도 불가능했다. 이에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육군과 합류하는 게 어떠냐는 선조의 물음을 전했다. <충무공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즉각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

임진년 이래로 5~6년간 적이 감히 양호(충청, 전라)로 직접 가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싸운다면 아직 할 수 있습니다.

今若全廢舟師,則是賊之所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此臣之所恐也。

지금 만일 수군을 폐하면 적은 곧 다행으로 여겨 양호의 오른쪽을 따라 한수에 이를 것이오니, 이는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戰船雖寡,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추가된 전선을 합쳐 13척의 전선을 편성한 이순신은 8월 28일 적선 8척의 기습을 받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공격해 모조리 몰아낸 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9월 2일 새벽 배설이 도주하였지만, 이순신은 일찍부터 적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어서 난중일기에 "오늘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라고 담담하게 적었다. 그 후 9월 7일 어란진에서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출격하여 모두 쫓아냈고, 새벽에 적선이 야습하자 여러 배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걸 보고 엄명을 내린 후 대장선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적선을 몰아냈다.

9월 14일, 일본군 대함대가 곧 서해를 타고 올라오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고 9월 15일 진영을 올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마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9월 16일 이른 아침, 수없이 많은 적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울돌목으로 출격했다. 얼마 후, 적선 130여 척이 조선 수군을 에워쌌다. 당시 조류가 왜군에게 유리하게 흘렸고,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후방에서 머뭇거렸다. 오직 이순신이 탄 대장선만이 최전방에 버티면서 에워싸려 드는 적선을 하나씩 격침했다. 그러나 형세가 갈수록 위급해지자, 호각을 불어 초요기를 걸고 중군장과 여러 전선을 소집했다. 그 중 거제헌령 안위가 탄 배가 먼저 도착하자, 이순신이 호통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안위는 급히 전장에 뛰어들었다. 뒤이어 중군장 김응함이 도착하자, 이순신이 꾸짖었다.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만 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으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김흥암 역시 급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전세는 점점 조선군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에게 포위되어 꼼짝 못하는 걸 보고 즉시 선회하여 왜선 3척에 포격을 가해 모조리 침몰시켰다. 그 후 물살이 왜군 쪽으로 바뀌자, 뒤에 처져 있던 조선 수군이 일제히 가담하여 공세를 개시했다. 게다가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수급을 취해 걸어두자, 왜군의 사기가 크게 꺾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를 추격해 전선 31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다.

그 후 이순신은 당사도, 아외도, 홍농, 위도, 고군산도로 북상하면서 흩어져 있던 전선을 수습하였고, 10월 3일에 고군산도를 출항하여 9일에 해남 우수영에 복귀해 3일간 머문 뒤 10월 11일 신안 안편도에 있다가 29일에 목포 고하도에서 100여 일간 머물며 함대를 재건했다. 이때 피난민이 그에게 의탁하고자 몰려들어 군량 확보가 어려워지자, 이순신은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발급받은 배만 통행을 인정하고 발급받지 않은 배는 왜선이나 간첩선으로 간주했다. 이에 모든 배가 통행첩을 받고자 하였는데, 이순신은 그 대가로 쌀을 내게 하였고, 곧 군량이 대거 확보되었다. 그러나 아산에 침입한 왜군에 의해 막내 아들 이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순신은 슬피 통곡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 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 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 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 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 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 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 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이후 1598년 2월 17일 고금도에서 새 군영을 차리고 명나라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은 그해 7월 19일 절이도로 침입한 왜적 100여 척을 공격해 적선 50여 척을 격침시키고 수급 71개를 베었다.(절이도 해전) 9월 말 명나라 육군과 연합하여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 왜군을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 공격하여 전선 30척을 침몰시키고 11척을 나포하고, 적병 3천 명을 사상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명나라 수군 800명이 사상되었고 이를 구하려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조선 수군 130여 명이 전사하였다.(왜교성 전투)

고니시는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진린을 매수하여 전령이 쪽선을 타고 빠져나가는 걸 방관하게 한 뒤,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시마즈는 300여 척에 달하는 전선을 이끌고 순천으로 향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해 이들을 함께 쳐부수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뒤, 11월 19일 새벽에 노량 해협에 전열을 세우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적이 접근해오자, 조명 연합수군은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노량 해전이 발발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왜선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였고, 이순신은 이들을 추격했다. 그러던 중 불의의 탄환에 저격당하여 가슴이 꿰뚫렸다. 이순신은 죽기 직전 주위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공격을 이어갔고, 일본 수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왜선 200여 척이 격침되었고 사상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진린의 보고에 따르면, 적선 200여 척을 분멸하고 군선 100여 척을 포획했으며, 500여 급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반면 조선 수군은 이순신, 이영남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전사하였고 250 여명이 사상하였고, 명나라군은 등자룡을 포함한 여러 명이 죽고 전선 1척을 손실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노량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군에 알려져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따르면,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3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유해를 실은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몰려들어 운구를 붙들고 통곡하였고, 선비들은 제문을 지어 제사했으며,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유해는 1599년 2월 11일 아산 금성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1601년 수군 장병들이 좌수영 옛터에 충민사를 세워 이순신을 추모하였고, 1603년 부하들이 타루비를 세웠다. 1604년 조정에서 좌의정을 겸하여 덕풍부원군을 봉하고 선무일등공신으로 삼았다. 1606년 통영에 충렬사를 세웠으며, 1614년 묘를 아산 어라산으로 옮겼다. 1643년 이식이 시장을 쓰고 인조가 시호로 충무(忠武)를 내렸고, 1659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초사를 철거하고 대사당(大祠堂)을 세우고 이충민공비로 고쳐 세웠다. 1661년 송시열이 남해 노량에 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이공묘비 글을 지었고, 1663년 현종이 노량에 충렬사 현판을 내렸다.

1706년 충청도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산 현충사가 세워졌으며, 1733년 12월 호남절도사 이명상이 이충민공비를 이충무공비로 고쳐 세웠다. 1792년 8월 19일 정조가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지시하여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으며, 1793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이렇듯 이순신은 조선 시대 내내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역대 임금과 선비들의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에는 성스러운 영웅이라는 뜻의 '성웅'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한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무수한 명장이 등장하여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순신과 같은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사전 준비, 정보 수집, 작전 수립 및 수행, 전력과 군기 유지, 부하 관리 등 명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갖췄다. 게다가 원균이 질색할 정도로 갈구고 전쟁 판도마저 왜군에 힘을 싣는 중에도 오로지 나라만을 위하는 마음과 자세는 세계사를 살펴봐도 좀처럼 찾기 어려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1][2]

최대한 유리한 전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걸 주요 전술로 삼았다. 하지만 명량대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극한 상황에 처해도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대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거만하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명나라의 진린 마저 그에게 감화되어 적극 따랐을 정도니, 인화술 역시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이순신과 반목한 원균은 대체...... 한 마디로 약점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명장이었다.

해외 커뮤니티에서의 평가는 대체로 상당히 높게 보고 있다. 일례로 레딧에서는 항상 상위랭크에 올라가 있는데 특히 역덕들의 입에서 빠지지 않는 불세출의 명장으로 표현된다. 이순신과 같이 거론되는 명장으로는 체스터 니미츠, 도고 헤이하치로, 호레이쇼 넬슨 등이다.

군사학적 비평[편집 | 원본 편집]

인류사상 유례가 없는 해상 비대칭 전력 운용의 천재

이순신의 활동 배경인 임진왜란기 전반의 조선측 전황은 매우 암울했는데, 이는 병사 개개인의 평균적인 백병전 소양은 물론이고 사격술 소양까지도 최근까지의 실전경험을 통해 높게 유지하고 있던 왜군 측에 비하면 조선 측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형 운용으로 열세를 어느정도 극복할 수도 있는 육전이 아닌 해전에서는 더더욱 불리했다. 왜냐하면 전근대 해전은 결국 접선전의 우열로 승패가 결정이 되며 난전인 만큼 어느쪽이 더 칼과 총을 잘 쏘는 숙련된 선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대형총통과 특수탄을 대거 도입하고 독창적인 역할분담형 민관협동 포격전법을 창안하여, 아예 접선전 자체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적선을 깨뜨리거나 적 승선인원을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아예 전장의 판도를 뒤집어버렸다. 본래 격침이란 전투능력을 상실한 적선이 귀환하지 못하도록 화공으로 막타를 치는 소각에 가까웠던 것인데 이순신은 적선이 충분히 접근하기 전에 미리 장군전으로 일격에 선저까지 관통하여 선제 침몰시키는 전법을 고안했고, 또 화약병기 사용은 보통 접선에 성공하여 도선 직전에 적의 기세를 꺾고자 각자 개인화기를 일제사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순신은 총통에 꽉꽉 채워진 파워풀한 조란환 한방으로 살상력을 극대화시켜 근접한 적선을 순식간에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남들이 다 총칼들고 접선전 하는 시절에 혼자서 거리가 멀면 날개안정분리철갑탄으로 배를 깨부수고 거리가 가까우면 유산탄으로 사람을 찢어버리는 비대칭의 최첨단을 달리는 전투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승무패라는 전설적 전적과 특히 명량해전의 기적같은 승리를 일궈내는 큰 축이 되었다고 볼 수있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한국 원의 100원짜리 동전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복장이 갑옷 차림이 아닌 관복(官服) 차림이고, 동전 도안 특성상 설명이 붙지 않기 때문에 "문관인가?" 라는 판단으로 이순신인 줄 몰라뵈는 사람이 무진장 많다. 표준영정이 관복 차림인 걸 어쩌라는 거냐... 과거엔 3차 500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이었다.
  • 광화문광장의 이순신상(像)은 경복궁의 광화문 앞에 자리한 세종대왕상 앞에 근엄하게 서있어서 왕을 지키는 무관의 모습으로 자주 비유된다.
  • 저서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개인이 저술한 일기인 《난중일기》가 전한다. 오늘날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문장이 무인답게 간결하고 명료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명저로 칭송 받았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한 예로 고구려의 연남생을 예로 들 수 있다. 연개소문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과 능력을 갖췄지만 연남건, 연남산이 권력을 빼앗고자 연남생을 시기했고 그로인해 점차 고구려에서 밀려 당으로 넘어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역적이 되어버렸다.
  2. 물론 그렇다고 가족에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난중일기에서 어머니와 병에 시달리는 자식 걱정을 하는 내용이 틈틈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