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 충무공 이순신

명량대첩(鳴梁大捷)은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맞붙은 해전이다. 명량(鳴梁), 오늘날의 진도 해협에서 발생했다. 정유재란의 전환점이 된 대첩으로, 133척 대 12척이라는 전술을 넘어 상식적으로도 이길 수 없는 전투였으나 이순신과 휘하 조선 수군은 불가능을 현실로 바꿨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양을 사수하고 서해의 해권을 장악해,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돌리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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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의 재건[편집 | 원본 편집]

칠천량 해전에서 사실상 궤멸당한 조선 수군은 남해에 대한 재해권을 완전 상실하였고 총 지휘관 원균은 전사한다. 이에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다만 본래 정2품이던 충무공의 계급보다 한 단계 낮은 정3품으로 낮춰지며 이는 후에 지휘권 문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던 초계에서 호남영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기를 모았다. 그리고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의 복직 교서가 도착하자 구례로 이동하였고 8월 8일 순천에 입성하였다. 이후 순천을 떠나 9일 보성에 도착하여 16일까지 머물렀다. 이때 순천부사 우지척이 일행에 합류하게 되고 11일에는 송희립과 최대성이, 다음날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하는데 본영의 군기 없이 온 죄로 곤장을 때린다. 8월 18일에는 회령포로 이동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배설의 전선 10척을 회수하며 어느 정도 부족한 해상전력을 재건한다.

전투의 경과[편집 | 원본 편집]

음력 9월 16일 아침 초병의 보고에 따라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저지하러 출격한다.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당한 조선 수군으로서는 300여 척이 넘는 일본의 함대를 정면에서 막아내기란 불가능했고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길목인 울돌목을 차단하게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한양으로 곧장 진격하던 일본 수군은 공세가 저지당하며 서해 진입이 차단되었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조선 수군도 서해 방면으로 후퇴했고 전력을 회복해 일본 수군을 견제하며 전선이 한반도 남부에 유지되도록 억제했다. 결국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의 공세는 좌절되었고 전쟁의 양상은 조선 쪽으로 유리해 진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