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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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출옥 후 박준채와 함께 사진을 찍은 유찬옥(왼쪽).

柳贊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찬옥은 1916년 10월 4일 전라남도 나주군 문평면 국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준채의 고종사촌으로, 1929년 당시 박준채의 집에 함께 기거하며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 2학년을 재학했다. 1929년 10월 30일 박준채가 나주역에서 자신의 누이인 박기옥과 친구 이광춘을 희롱한 일본인 학생을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이 모든 잘못을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몰아붙이자, 박준채는 분노를 삼키며 친구들과 함께 열차를 떠났다.

이 일은 곧 광주-나주간 통학생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격분한 한인 학생들이 11월 3일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된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동교 학생 홍민후(洪敏厚), 신간회 나주지회의 박공근·양영택·박동희 등과 함께 시위를 벌이는 일을 논의했다.

이들은 11월 25일 밤 박공근의 집에 모여 11월 27일 나주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때 유찬옥은 광주학생봉기의 격문 등을 참고하여 원고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음은 박공근의 도움을 받아 유찬옥이 작성한 격문의 일부이다.

보라.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저들의 편협한 행동과 추악한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도 인간으로서 자유가 있다. 오늘 무엇 때문에 이러한 압박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힘으로써 싸워 자유를 획득하자. 우리의 무기는 단결이다.

이 격문은 2천부가 인쇄되어 11월 27일 장날, 나주학생독립운동 때 배포되었다. 유찬옥은 농업보습학교 및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운동을 하도록 권유하여 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보통학교 학생 130명이 항일시위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학생들은 곳곳에서 격문을 배포하였고 '조선민중만세조선학생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1930년 4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2] 수감 도중 장진홍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 옥중에서 자결한 사건과 관련해 강력히 항의하다 징역 8개월을 가형받았다. 1931년 8월 20일 출옥한 후, 1932년부터 나주노동조합운동(羅州勞動組合運動)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2월 11월 검거되어 기소유예(起訴猶豫)로 풀려 나왔다.

이후 나주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46년 5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유찬옥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