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제하

위제하.jpg

魏濟河.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4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애도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33년 중앙일보사 편집국에 입사해 회사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역할을 하면서 여러 민족인사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다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그는 1934년 여름 정주로 내려가 자택에서 또래 친구 30명과 함께 광조소년회(光朝少年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열혈청년론', '인생독본' 등을 읽고 토론했으며, 다음 4가지 사항을 기치로 내걸었다.

1. 문맹자는 글자를 익힌다.


2. 아녀자의 노고를 덜기 위해 흰색 대신 색깔 있는 옷을 입는다.

3. 음주와 도박을 삼간다.

4. 자주독립을 쟁취하자.

광조소년회는 1938년 겨울에 애도야학소년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위제하는 1940년 3월까지 이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1940년 8월 회원 한 명이 사복형사에게 잡히면서 조직이 발각되었고,[1] 그는 회원들과 함께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그해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다.[2] 반년간 모진 고문을 받다가 사상범으로서 대화숙(大和塾)[3]에 보내졌다.

이후 1943년경 도쿄로 유학가서 대성중학교에 재학하던 그는 10월 5일 학도병 모집을 피하려고 밤에 시모노세키 항에서 배를 타려 했다. 그런데 친구가 하룻밤만 머물다 가라고 해 그러기로 했는데, 다음날 배가 현해탄에서 격침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 8.15 광복을 맞이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대화숙에서 함께 지냈던 한설야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여 26세의 나이로 평양고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공산화가 급격히 진행되자 월남하였고,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여 1949년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대학에 다닐 때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에서 빈민사업을 시작해,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적십자 후원을 받아 질병을 치료했다. 그러다 적십자 소속 간호사로 일하던 조용화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한강철교 밑에 천막교회를 세우고 빈민들과 함께 지냈다. 1963년 6월 지인의 권유로 진우원 원장을 맡아 고아를 수용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복지 활동을 벌였으며, 허허벌판에 꽃과 나무를 심는 등 지역 경관을 가꾸는 활동도 수행했다. 201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2012년 경남도 민간복지 대상을 수여받았다.

2017년 1월 23일 김해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4] 2017년 1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