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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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承南.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7월 5일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재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서울에서 발발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3월 31일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숨겨 가지고 귀향한 뒤 이미 강진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고 있던 이기성(李基性)·황호경(黃鎬京) 등을 만나 서울의 정황을 알려주고 다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4월 2일 남성리에 소재한 이기성의 집에서 다시 만나 4월 4일의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읍내 남포리교회와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려주는 한편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3백여매, 독립선언서 70여매, 독립가(獨立歌) 20여매를 등사하여 두었다.

4월 4일 오전 9시, 이기성의 집에서 독립만세 시위방법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준비된 유인물을 각기 분담하여 동성리 장터로 운반하였으며, 거사 신호인 예배당의 정오 종소리가 울리고, 김후식(金厚植)이 군청 뒤 산마루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시위군중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1,0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진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히려 징역 1년 6개월로 늘어났다.[2]이에 불복해 상고하였다. 그러나 1919년 6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3]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2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오승남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20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86호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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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