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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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鼎洙(또는 安定洙, 安正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신한민보> 1940년 8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정수는 1878년생으로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양반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1897년 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서양에 관한 기초 소양을 갖췄다. 한성영어학교는 1893년 강화 무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이 1894년 육영공원을 인계받아 한성영어학교로 재편한 왕실운영 학교였다. 한성영어학교는 육영학원과는 달리 계급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학생을 선발했다. 이런 까닭으로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상민계층의 자제가 함께 어울려 공부하고,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가 돈독하여 근대화 운동의 주역들 중 한성영어학교 출신이 많이 있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과 어울렀는데, 특히 현순, 김경민, 장응진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898년 현순이 한성영어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허치슨의 고압적인 교육방침에 크게 반발하여 그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나 좌절하고 학교를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안정수는 그만두지 않고 1899년 한성영어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영국인 찰스 머스가 해관장으로 있는 제물포 해관에 취직하여 근무하던 중 제물포교회 담임목사 존스에게 세례를 받고 제물포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해 12월부터 제물포교회의 교인 지도자로 부상하여 제물포교회 부속 매일학교인 영화학당의 야간 영어교사로 봉사했다. 안정수는 주간에는 제물포 해관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에는 영화학당에 나와 초급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존스 목사는 1899년 연례보고서에서 안정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 매일학교는 능력 있고 성실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신자인 교사 안정수에 의해 드디어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온 이후로 그는 모든 일에 도움이 되어 왔다. 그는 한문과 언문뿐만 아니라 초급 영어도 가르쳤고 그 결과로 학교는 이전보다 더 좋은 상황에 있게 되었다.

1901년, 안정수는 한국 최초의 엡윗청년회인 나인데 청년회에서 통신국장을 맡았고, 그해 9월 나인데 청년회가 주최한 고종 황제 탄신 50수 기념 경축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황제 성덕이 외외하셔 일월같이 비치시나 흑운 같은 산하가 총명을 옹폐하니 먼저 신민의 본분을 국사함이 가한 줄 아옵니다."라고 연설했다. 또한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 서한국지방회 제1차 회의에서 서기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김동현, 장원근, 손승용과 함께 제물포교회의 권사로 임명되어 구역 전도사인 장경화, 복정채를 도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또한 그는 우병길, 장경화, 최봉현, 등과 함께 영화학당을 ‘대한 인항 미이이감리교회 사립영화학당’으로 개명하고 서당식 매일학교에서 벗어나 근대식 학교로 변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02년 11월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의 주도로 제물포에 하와이 이민대행 업체인 동서개발회사 본점이 세워졌다. 이때 안정수는 존스 목사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데실러의 통역직원으로 입사했다. 데쉴러는 1903년 봄이 되기 전까지 하와이 이민단을 보내야만 한다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하여 1902년 12월까지 1차 하와이 이민단을 제물포항에서 출발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동서개발회사는 제물포에 본사를 두고 평양, 원산 등 전국 주요도시에 지점을 운영하였다. 확장한 지사를 관리할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한성순보 광고에 냈다. 이때 현순이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하와이 이민을 간다는 조건으로 동서개발회사에 취직하면서 안정수와 재회했다. 안정수는 현순, 육정수, 송언용, 장경화 등과 함께 하와이 이민을 한국인에게 권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예상외로 지원하려 하지 않자, 데쉴러는 하와이 이민단 구성에 큰 차질을 빚게 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알렌 미국공사와 협의했다. 알렌 공사는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을 뿐 더러 불법적인 상행위로 법적 조치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도움을 받았던 존스목사가 나서서 하와이 이민을 독려해 주기를 요청했다. 존스 목사는 추운 겨울이 다가기 이전에 하와이 이민단을 보내야 하는 까닭에 1902년 12월 1차 하와이 이민단 출발 시한을 1개월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제물포 교회 교인과 제물포항 노동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하와이 이민을 권유하고 설득했다. 그러자 제물포 교인 남녀 50명과 항내 노동자 20명이 이민가기를 자원했다. 여기에 추가로 모집된 인원이 합세하면서, 1902년 12월 말에 제물포 항에 집결한 조선인의 숫자는 102명이었다.

안정수는 1902년 12월 22일 1차 하와이 이민단 102명을 이끌고 제물포 항을 떠났다. 현순도 이듬해인 1903년 2월 10일 2차 하와이 이민단 통역으로 90명을 이끌고 떠났다. 안정수는 제물포 교회 권사인 김이제와 함께 102명의 하와이 이민단을 하와이로 이끌고 가면서 갤릭호 안에서 매일 예배를 보았다. 이것을 미국 한인 감리교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3년 1월12일 호눌루루에 도착하여 존스목사의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피어슨 하와이 감리사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일본 나가사키와 호눌룰루에서의 신체검사를통과하여 최종적으로 하와이에 상륙한 이들은 86명이었다. 하와이 이민들은 오하우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첫 생활을 시작했고,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봤다.

안정수는 사탕 농장 경영주 동맹회 노동부의 통역직원이 되어 영어를 하지 못하는 이민들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리고 제물포교회의 윤병구 권사와 함께 호놀룰루 시내에 하와이 이민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여 1903년 11월 첫 주일 리버와 스트리트 호텔 모퉁이 방을 빌려 한인 감리교 선교회의 이름으로 예배를 봤다. 이것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1903년 2월 18일, 제물포교회 구역전도사인 홍승하가 한인 감리교 선교회 담담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하와이에 왔다. 그리고 1905년 4월 한인 감리교 선교회는 최초의 공식 한인감리교회로 출발했다. 안정수는 1903년 8월 임치정, 홍승하 전도사 등과 함께 하와이 교포 공동체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 하와이를 선교와 함께 민족운동의 핵심체로 만드는 초석을 마련했다. 얼마 후 신민회가 하와이 교포의 정치적 의식 박약과 공화주의를 내세운 것에 대해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성토하는 이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해체되고 말았지만, 안정수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하와이 교포의 구국정신과 대동단결을 고취시키기에 힘썼다.

1904년 말, 안정수는 미국 본토에 사는 한인 교포선교를 위하여 문경호, 이교담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리고 1905년 박용만과 함께 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어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공립협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14일 공립협회 회관이 마련되었고, 11월 20일 공립신보가 창간되었다. 하지만 안정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종차별이 심하자 인종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고 기독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네브라스카 주로 박용만과 함께 이주했다. 1906년, 박용만이 네브라스카 대학교 헤스팅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자, 안정수도 곧 네브라스카 대학교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1907년, 안정수는 네브라스카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했다. 1907년 10월, 그는 뉴욕에 있는 한인 교포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제회를 구성하여 1905년 한일보호조약 이후 일본이 뉴욕 일본영사관을 통하여 한인 교포사회의 정세를 정탐하며 한인 교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간섭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인구조사를 하는 것을 강력 저지했다. 1908년 5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안착한 그는 그해 7월 8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대표로 이승만을 영접하러 샌프란시스코 역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08년 12월 시카고로 이주해 노스웨스트 대학에 입학했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오하이오 주로 이주했으며, 1916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미술상점을 개업했다. 그는 처음에는 5천원 정도의 진열품으로 시작했지만 탁월한 사업 수완에 힘입어 영업이 날로 번창했다.

1918년 1월, 안정수는 사업 관계로 정향주, 박기수와 함께 한국에 잠시 귀국해서 1919년 3월까지 체류했다. 그는 3.1 운동을 목격한 뒤 미국 한인 사회에 진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조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1919년 4월 10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대한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성공할 민족이니 하느님이 졍의의 서시샤 우리 二千오百만 동포로 더부러 싸호시는 듕이오. 세계 형셰가 우리를 도읍는 동시 일본은 세계련합회에셔 버셔나는 듕이니 우리의 앞길은 찬란한 셔광이 빗치온 하는 정즁한 마대에 일반의 일정한 긔상은 더욱 굳세히 떨치더라.

- <신한민보> 1919년 4월 19일자 기사

또한 안정수는 개성 출신의 이기호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조국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여론 형성에 주력했으며,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경찰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하여 피살당하거나 부상을 당한 고국 동포를 돕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이창배, 박장술, 이준호 등과 함께 오하이오 주를 중심으로 긴박한 조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한국 사정을 알리기 위해 각 교회를 방문했으며, 1920년 3월 호머 헐버트 박사를 초청하여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의 사정을 알리며 미국의 동정과 후원을 호소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안정수는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19년 6월 오하이오주 콜롬버스에서 개최된 미이미교 백년기념 한인대표자로 참석했다. 또한 오하이오에서 미술상점을 운영하면서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술상점을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자본금 10만원을 기반으로 중국향을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안정수가 제조하여 판매한 중국향은 큰 반향을 일으켜 안정수의중국향 제조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그는 이렇듯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대한인국민회 뉴욕 지방회에 가담하였고, 1920년 3월 뉴욕지방회 1주년 기념식에서 ‘국민 자격과 국민회’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2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특명 전권공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현순이승만에 의해서 파면되고 공금횡령으로 몰리는 어려움을 겪자, 그는 직접 나서서 현순을 변호했다. 그는 공동회를 열어 모인 뉴욕 한인동포에게 이승만이 임효, 조병옥을 통해 서재필 박사를 움직여 현순을 모함하도록 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현순이 하와이로 다시 돌아가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격려해줬다. 이후 1922년 4월 18일, 안정수는 뉴욕에 사는 한인들이 예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뉴욕 한인회, 흥사단, 한인학생회, 동지회, 대한인국민회 뉴욕 지방회 등의 단체들에게 각종 활동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뉴욕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뉴욕 한인감리교회를 3.1절, 8.29 국치일, 신년축회 등 뉴욕 한인 교포들의 대내외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일본 뉴욕 영사관은 뉴욕 한인감리교회를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교회로 간주하고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1924년 12월 10일, 안정수는 뉴욕 한인교민단을 설립했다. 그는 뉴욕 한인교민단을 통해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 등에 고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만든 구미위원회를 적극 후원했다. 특히 인구세 징수, 애국공채 발행 등의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9년부터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한국 선교사였던 노블선교사, 존스선교사 부인들이 미국인 여성후원회를 구성하자, 그는 뉴욕 한인감리교회를 한인 유학생들의 숙소로 제공하도록 했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안씨 중국향 제조회사에서 제조한 향을 판매한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줬다.

한편 안정수는 조국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9년 7월 조선 적십자사를 돕는 행사에 참여하여 의무금 5원을 냈고, 1920년 11월 현순이 직접 고나장하고 있던 구민위원회에 공채금 25원을 기부했다. 1921년 3월엔 간도 동포 참상 구제금을 5원 기부했으며, 열강회에 대한 특별 연조에도 참여해 100원을 내기도 했다. 1933년 서울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강당, 체육관 건설 기금을 모금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보전기념 사업회 뉴욕지회를 조직하고 회계를 맡아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 2월, 안정수는 3.1 독립선언기념일 행사를 뉴욕 내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치르기로 하고 뉴욕 한인 공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38년 3월 임시정부의 재정을 후원하기 위한 뉴욕 한인단체 재정 조사위원, 5월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실업부원, 9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시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항일동맹단 단장으로 중국에서 항일전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의 후원금을 모집하였고, 1940년 뉴욕지방회 구제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7월 29일에 뉴욕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안정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