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 해전

악티움 해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기원전 32~31년
위치 이오니아 해 악티움 반도 서편 해역
결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교전단체
로마 옥타비아누스 로마 안토니우스 파,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아그리파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병력:
함선 260척 3만명
병력:
함선 300척 2만명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3인에 의한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면서 안토니우스가 로마 동쪽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서쪽을, 레피두스가 아프리카를 통치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당시 카이사르의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로마 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로마의 보급선이 끊어지고 제해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제해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함대를 건설하였으나 기원전 37년 쿠마에 해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패전하고 말았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의 오랜 친구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 재건을 도왔고,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였다. 이 때 아그리파가 건설한 함대는 포에니 전쟁 당시의 5단 노선보다 훨신 더 큰 함선을 건조하였는데 이 함선들은 투석기를 장착하고 적의 충각으로 부터 선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흘수선 부근을 별도의 가로 빔을 사용하여 보강하였다. 이러한 준비 끝에 아그리파는 시칠리아이탈리아 본토 사이의 나울로추스에서 폼페이우스의 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부 속주들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32년에 안토니우스과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눈이 맞아 결혼하면서 결국 2차 삼두정치가 붕괴하고 두 세력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해전의 경과[편집 | 원본 편집]

전투 직전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전비를 지원받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 가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이동하였다. 당시 안토니우스 휘하에는 30개 군단 15만명의 병력과 함선 500척이 있었으며, 함대에는 아그리파가 사용했던 함선과 같은 강력한 대형 함선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충성심과 전투의지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그리스로 이동한 안토니우스는 코린트 만 입구의 파트라스에 주둔하고 암브라키아만에 함대를 정박시켜두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의식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대한 준비는 거의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그리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향락에 빠져 6개월이라는 시간을 빈둥빈둥 보내주는 덕분에 그 기간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거기에 충성심이 부족했던 안토니우스 휘하의 부대 중 상당수가 이탈을 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공격[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31년 봄,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부룬디시움과 타렌툼에 군대를 집결시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전의 나울로추스 해전에서 승리했던 함대가 이 과정에서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해군 사령관이던 아그리파는 어쩔 수 없이 대형함의 건조를 포기하고 대신에 소형이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리부리안을 건조하여 260척의 함대를 재건하게 되었다.

아그리파는 파트라스에 주둔한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해상을 통한 보급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 바로 해상봉쇄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리부리안의 빠른 기동력을 이동하여 안토니우스의 수송선을 잇달아 나포하면서 밥줄을 끊어놓기 시작하였던 것. 또한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악티움의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아드리아해를 확보하게 된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함대가 정박중인 악티움에 지상군을 전진배치하고 자신의 장기인 지상전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대규모 회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육지에서 압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와 동시에 아그리파의 함대는 코린토스와 파트라스, 레우카스를 점령하여 안토니우스를 지원할 수 있는 배후도시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끊어진 보급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탈주병이 속출하여 지상전을 전개할 여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는 로마군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와 이집트군이 중심이 된 비주전파 사이에 내분까지 발생하여서 더더욱 상황이 악화되고 만다.

악티움 해전[편집 | 원본 편집]

아그리파는 암브라키아 만의 안토니우스 함대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1개 전대를 해당 해역으로 배치하였다. 이것으로 안토니우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탈출하여 다시 이집트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클레오파트라가 지지하면서 이집트의 함선 66척이 안토니우스의 함대에 가세하게 되어 그나마 숨을 돌릴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측은 함선에 실을 병력이 부족하여 결국 500여 척의 함선 중 300척의 함선에만 2만 명의 병력을 승함시키고 나머지 200여 척의 함선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9월 2일 오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함대를 3개 전대로 편성하여 전투진형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익은 겔리우스의 지위 아래 북쪽 해안 근처에 자리하였으며, 중앙은 유스티유스가 지휘, 좌익은 코엘리우스가 남쪽 해안에서 지휘를 하였다. 이에 맞서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총 250여척 3만명의 병력으로 아그리파아 중앙의 전대를, 루리우스가 남쪽의 우익전대를, 아룬티우스가 북쪽의 좌익전대를 지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아그리파는 중앙전대의 전진을 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었는데 이는 보다 대형인 안토니우스의 함선들이 밀집대형을 이룬 상태로 측면 해안선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크기가 작은 아그리파의 함선들로는 포위공격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정오경 바람의 방향이 북동풍으로 바뀌자 안토니우스는 이를 이용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통상 당시의 함선이 이 전투에 나설 경우에는 돛대와 돛을 제거하고 전투에 돌입하여야 하는데 이 때 안토니우스는 전투가 목적이 아니라 탈출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돌입하면서도 돛대와 돛을 그대로 단 상태로 전투에 돌입하였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안토니우스의 양익 전대가 중앙보다 더 빨리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에 맞서 아그리파는 함대를 외해쪽으로 유인하면 포위가 쉬워지는 것을 파악, 서서히 함대를 물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외해에 안토니우스의 함선들이 도달하면서 측면을 막아주던 해안선이 사라지자 옥타비아누스 측의 함선들이 반전, 안토니우스의 함선들에게 이리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기동력이 느린 안토니우스의 함선 1척에 크기는 작지만 기동력이 빠른 옥타비아누스의 함선 3~4척이 달려드는 상황이 되면서 함선의 크기는 안토니우스 측이 유리했지만 막상 접근전이 시작되자 상황은 점차 옥타비아누스측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상황에서는 고대 해상 전술의 주 전술인 충각이 전혀 사용되지 못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 측은 충각을 감행하기에는 함선이 너무 작았고, 안토니우스측은 충각을 하자니 이미 포위당한 상황이 되어버린데다 함선이 느려서 제대로 기동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전에 시작한 전투는 정오가 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함상 백병전과 불화살에 의한 공격이 오가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포위당한 안토니우스 측의 함선들의 피해가 좀 더 큰 상황이었으나 전세가 결정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후 1시 경 클레오파트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전장에서 이탈하고 뒤이어 안토니우스도 갤리선 몇 척과 함께 클레오파트라를 뒤쫓아가면서 승부의 추가 허망할 정도로 기울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안토니우스의 탈출을 기점으로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그대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몇 시간 뒤 안토니우스의 함대 일부만이 악티움으로 도주하였고, 나머지는 불에 타서 가라앉거나 나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안토니우스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지중해 동부지역의 여러 속주들과 로마의 동맹들이 잇달아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하게 되면서 그의 세력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다음 해 7월 이집트로 원정을 감행, 이집트에 상륙하였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되면서 로마의 2차 삼두정치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걸로 로마의 모든 권력은 옥타비아누스 1인에게로 돌아갔으며 기존의 공화정 로마가 제정 로마, 즉 로마 제국이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약 400여년간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면서 사싱상 지중해가 로마의 내해(內海)가 되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 유지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