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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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敬愛(또는 申慶愛).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9월 22일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1]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집안은 부유한 한의사 집안으로, 일찍이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수했다.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공부하라는 가톨릭 신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미신과 문맹에 빠진 제주 여성들에게 글과 셈법 등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주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일제 경찰이 그런 그녀를 수상하게 여겨 감시하자,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조용히 공부하는 여학생으로 위장하면서, 비밀리에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설립되었고 1927년 5월 27일 신간회의 자매회로서 전 여성운동의 통일기관인 근우회가 창립되자, 신경애는 근우회 광주지회장을 맡았다. 또한 1927년부터 공산주의 계열의 화요파 소속 경성여자청년동맹과 서울파 소속 경성여자청년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무산계급의 승리 및 여성해방을 위해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주창하는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에서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광주 수기동 출신의 강영석과 결혼한 뒤, 1928년 7월 근우회 임시대회에 경성지회 대의원으로 참석하였다. 7월 30일 근우회 경성지회 수제회에서 정치문화부를 맡게 되었다. 9월 10일 근우회 본부 및 지회 연합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 관북지역 수해 동정금 모집 위원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신간회 광주지회 기금부(基金部)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가 경운동 천도교기념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광주지회 대의원으로 참석하였고, 경기도 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9월 10일 광주 흥학관(興學館)에서 조선청년총동맹 전남 도연맹 제2년 제2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여학생들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권유하였으며, 1930년 10월을 전후하여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온 오산세의 지도를 받아 경성제국대학생 유기춘(柳基春)·황봉순(黃鳳舜)과 함께 1931년 3월 하순경 공청 가두(街頭) 야체이카를 조직하였다.

1931년 4월경 신철(辛鐵)·정종명(鄭鍾鳴)·이적효(李赤曉)와 함께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여 전날 4월 30일에 서울에서 일제히 공장이나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에 격문을 뿌려 노동운동을 선동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31년 4월 22일에 용산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용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해 5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7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8월 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에 가입하여 12월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에 주력하던 중 다시 체포되었다. 1년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던 중인 1933년 4월 28일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형사들은 남편과 동지들의 행적을 대라고 협박하며 사망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가했다. 신경애는 물고문으로 허파가 터지고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극한 고통을 겪어도 일제의 협박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신경애가 극심한 고문으로 사망 직전에 이르러서야 석방되었는데, 한의사인 부친과 광주의 부호였던 시아버지 강호일이 온갖 좋은 약과 병원 치료를 해주어 살려내곤 했다고 한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딸 강화성을 낳았고, 1943년 강명성을 낳았으며, 광복 후 서울로 돌아가 막내딸 강인홍을 낳았다. 1964년 5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신경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9년 11월 16일 남편 강영석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남편 강영석이 2010년 12월 10일 건국훈장 서훈 취소 판정을 받으면서, 국립현충원에서 남편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현재는 많은 군면리 통합을 거쳐 개성특별시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개성시 용흥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