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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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부터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6년 5월 14일 전라남도 광주군 기례방면 성저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5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광주청년회 위원장을 맡은 이래로 광주청년연맹 위원장, 전남청년연맹 지방순회위원, 광주 신우회 임원을 지냈다. 이후 조선 공산당과 고려공산천연회에 가입하여 광주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활동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장석천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구속된 조선인 학생 석방을 위한 선전, 선동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형무소에서 복역 중 전향서를 제출하고 출옥한 그는 박희도가 운영하던 <동양지광>에 가담했다. 그는 <동양지광> 1939년 7월호부터 11호까지 5회에 걸쳐 '황도조선'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 민족과 일본 국체"를 찬양했다.

조선 민족은 (일본과) 인종적으로 지리, 정치학적으로 운명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명확한 인식이 가장 긴요한 일이다.

1939년 9월 동양지광사 경리부장을 맡은 그는 내선일체를 구현하기 위한 '동아협화이념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녹기> 1939년 9월호 '조선인 청년으로부터 내지인 청년에게 바란다'라는 특집에 '세계 개현(開顯)의 사명 인식'이라는 글을 실어 일제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그리고 동양지광사가 주최한 '내선일체 부인좌담회'에 참여했으며, 뒤이어 열린 신극간담회에도 참여했다. 또 <동양지광> 1940년 1월호에 <동아선각지사기전의 독후감>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국체주의 경제조직이란 자본주의부터로도 가장 최선인 것을 섭취하고, 공산주의로부터도 가장 최선인 것을 섭취하여 그것을 통합하여 전 인류가 모두 무차별로 공존공영하는, 의식주에 곤하지 않고 지상 낙원을 실현하는 경제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조직이 없으면 내선일체도 팔굉일우(八紘一宇)도 괴성일 뿐이다. 진실로 내선일체를 완성하려면 물심 양면의 공존공영의 실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8.15 광복 후, 강영석은 조선공산당 광주시당 소속으로 담양군인민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좌익 계열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경기도 안양시에서 조용히 지냈고, 1991년 1월 24일에 사망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강영석이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조선인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교육, 학술 분야에 수록되었고, 국가보훈처는 그에게 주어진 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받은 끝에 2010년 12월 10일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다.

강영석은 1991년 1월 24일 안양에서 사망한 뒤 1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아내 신경애(申敬愛)와 함께 안장되었다. 그 후 건국훈장 서훈이 취소되면서 이장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아내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을 했고 친일 행적이 없는 명백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배우자와 관련한 별도 법 규정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아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