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식

宋東植.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12월 9일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영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10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인 동지들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를 재건하기로 합의하고, 자신은 김시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를 맡고 김몽길(金夢吉)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조길룡(曺吉龍)·유치오는 광주농업학교를 각각 책임을 맡았다. 이후 1929년 3월 선배 회원인 임종근(林鍾根)·김기주 등의 졸업에 즈음하여 동교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모여 졸업 후에도 항일학생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단결을 다짐하였다.

1929년 6월, 도쿄에서 돌아온 장재성)이 성진회 해체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항일학생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했다. 이에 송동식은 강달모, 김상환(金相奐), 김보섭(金普燮), 조길룡(曺吉龍) 등 광주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의 집에 모여 구체적 활동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했다. 이때 부서 및 결의사항도 정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클럽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한편 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 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아울러 조직확대를 위해 하부조직으로서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1929년 7월, 송동식은 강달모, 박노기 등 광주사범학생 15여명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을 협의하고 동년 9월에 광주형무소 뒷산에 다시 모여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회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원의 항일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교부받아 이를 독서회원에게 배포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광주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1929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항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2]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송동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