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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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寧熙.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 호는 검추(劍秋).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재학하던 중 은사인 이시영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여 수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교관과 학도감으로 일하였다.

1919년 8월 7일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할 때에는 서일·현천묵·김좌진·계화·이장녕·김규식·이범석 등과 같이 주요 간부로서 참여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 십리평에 설치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아 사관생도를 모집, 단기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8월에는 사령관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일하였다.

1920년 10월 18일 일본군 3개대대가 무산(茂山)에서부터 북로군정서를 습격하고자 진출하자, 군정서에서는 청산리 백운평 전방 삼림전투에 유리한 지점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근대를 임전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그는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 자유시로 이동했지만, 1922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귀환했다. 1924년 1월에는 총재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가입, 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조직하게됨에 따라 행정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3월 영안에서 김좌진·김혁(金赫) 등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할 때 김좌진·남극·최호(崔灝)·유현(劉賢)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단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신민부의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期)의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을 때, 그는 백종열(白鍾烈)과 함께 교관으로서 생도들의 군사교육에 진력하였다.

이후 신민부에서 항일운동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소련과의 교섭을 위하여 그를 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하였으나,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공산당원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경 정보기록에 의하면 1932년 1월 본적지의 친척형이 노령 모스크바로부터 그의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1930년에 공산당원에게 피살된 게 맞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