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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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泰洙. 본명은 문태현(文泰鉉), 자는 태수(泰洙) 또는 태서(泰瑞).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문주욱(文周郁)은 순조 대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되었고, 부친 문병현(文炳鉉)은 유생 신분이었다. 문태수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성향을 갖췄고 17세 때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갔다.

함평군의 구전을 바탕으로 작성된 '의병대장 문태서 전'에 따르면, 문태수는 러일전쟁이 격화되던 무렵에 금강산에 들어가 박처사(朴處士)를 만나 병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금강산을 떠나 서울을 거쳐 호서지방을 전전하면서 최익현을 만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공훈전자사료관이 정리한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문태수는 일찍이 군대에 입대하여 1907년에 '참교(參校·하사)' 까지 올랐다고 한다.

문태수가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기록마다 엇갈린다. '의병대장 문태서 전'에 따르면, 문태수는 1906년 봄에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산포수를 규합하여 고향 마을 부근에 있던 영각사(靈覺寺)에서 거병한 뒤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문태수는 정미7조약이 발표되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인 1907년 음력 11월에 전국 연합 의진이 형성될 때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참여하여 '호남 창의대장'에 올랐다고 기술되었다. 일제의 비밀문서에는 문태수가 1907년 11월 이후에 등장하는 것을 볼때, 그는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투쟁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문태수는 장수 양악 지역에서 활동하던 박춘실의 의병대와 합세한 뒤 1908년 1월 무주 구천동에서 전투를 벌이던 전성범의 의병대도 휘하에 맞아들여 덕유산 자락에서 활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13도 연합의병부대 일진으로서 서울 공략 작전에 참여했지만 서울 진격 계획이 좌절되자 의병을 이끌고 본래의 근거지로 복귀했다. 이후 2월에 의병 60명을 거느리고 무주주재소를 습격했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출했고, 4월에는 의병 150명을 거느리고 장수읍을 습격해 주재소와 군청을 불살랐다.

1909년 4월에는 약 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二東面)을 습격하고, 동년 5월에는 의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일군 헌병과 교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히고, 동년 8월에는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또한 10월에는 이원(伊院) 역을 습격하여 이를 소각한 후 일인 3명을 납치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의병을 빙자해서 약탈을 일삼던 무리들을 처단해씩에 주민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이는 1910년 1월 10일자 일본 비밀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북 무주 지방의 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과 같이 믿고, 부녀자는 부뚜막으로부터 음식을 궤로 옮길 때 처음 것을 문태수에게 제공하여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문태수는 무주군은 근거지로 삼아 금산, 영동, 옥천, 상주, 청주, 보은 등지에서 활동하며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했다. 그러나 1911년 9월 27일 고향에 찾아온 그는 매부인 임종두와 친구 조한기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의병대장 문태서 전'에 따르면, 일본 경찰들이 문태수를 시장에 세운 뒤 운집한 사람들에게 문태수의 '폭도 행위'에 대해 비판을 하라고 을러댔다고 한다. 군중들은 일본 군경의 위세에 눌려서 묵묵부답했는데, 위천면장 경헌중이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문 장군이 체포된 것은 2천만 백의민족이 체포된 것과 같으니, 이제 삼천리의 운이 영원히 끊겼다.

이에 일본 군경들은 급히 진주로 호송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그는 진주에서 대구로,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일관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무렵에 옥중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체포될 당시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대구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일본 히로시마로 옮겨져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