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는 고대 로마군인이자 정치가로, 임기 무기한의 독재관에 오른 첫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91년-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1]에서 술라가 큰 활약을 했고 기원전 88년 집정관에 취임한다.

소아시아의 로마 동맹국 폰토스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집정관에 취임한 술라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쟁 준비에 착수하고 폰토스로 출정하려 하는데 이상한 소문이 돈다. 총사령관직을 술라가 아닌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맡긴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돈 것인데 이는 한 호민관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정치계에서 물러난 마리우스에게 총 사령관직을 맡긴다하자 술라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격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 집정관이 로마를 공격하는 최초의 사례이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계략을 펼친 호민관은 죽임당했다. 마리우스 추종자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한다.

기원전 88년 소아시아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술라는 기원전 87년 폰토스 정벌에 착수한다. 술라가 로마를 떠난 틈을 타 마리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입해 술라 지지자들과 50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고 기원전 86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마리우스는 임기 시작 13일 만에 사망하고 마리우스를 대신해 마리우스와 뜻을 같이 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2]가 집정관에 오르게 된다.

킨나는 소아시아에 나가있는 술라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술라 일파의 재산을 몰수하며 술라 지지자들을 국외로 추방한다. 폰토스 정벌에 성공한 술라는 기원전 83년 다시 로마로 병력을 이동시켰다.[3]

공화정 킨나의 군대와 술라의 군대 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졌고 기원전 81년 11월 술라가 다시 한 번 로마시에 입성한다. 술라는 또 마리우스와 킨나 지지파를 숙청하고 공직에 추방하며 재산을 몰수했다. 이 때 당시 18세였으며 마리우스 킨나 세력에 포함되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제거하지 않았다.

술라는 기원전 81년 임기 제한 없는 독재관직에 오른다[4] 민중파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호민관 권한을 축소시키고 호민관은 더 이상 다른 행정관이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또 재선을 위해서 최소 10년을 기다리도록 규정했다. 반면 원로원 의원수는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이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복원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기원전 80년 말 술라는 스스로 독재관을 사임하고 정치 일선에서 떠나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술라 자신이 복원시키려했던 원로원 중심 체제에 평생 독재관은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물러나지 않았을까라고 역사가들이 추정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루키우스 술라 시기 이후 제1차 삼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독재, 이후 제2차 삼두정치(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시기가 오고 그 중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로마 제정의 시대가 온다.

각주

  1. 이 때까지 아직 로마의 반도 동맹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즉 정치 참여는 못하는 시민권만 주어진 상황.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완전 시민권을 주자는 법이 무산되자 이탈리아 동맹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전쟁으로 이후 이탈리아 전역 주민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된다.
  2.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 될 인물이다.
  3. 술라 휘하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있었다.
  4. 독재관은 비상시에 선출되는 직책이며 선출되면 로마의 최고 권력을 부여잡는다. 원래 독재관은 임기 6개월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