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7왕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로마 왕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7명의 왕들을 일컫는 말이다.

목록[편집 | 원본 편집]

제1대 왕 로물루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753 ~ B.C. 715

자세한 것은 로물루스 문서 참고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715 ~ B.C. 673

누마 폼필리우스는 사비니인인데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았으며 로마로 이주해온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원로원이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추대했고 쿠리아회[1]에선 이를 승인해주었다.

1년을 12개월 355일로 하는 달력 태양력이 만들어졌고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누마 달력에서 1년을 10일 더 늘리게 되어 현재 세계에서 사용하는 태양력 달력의 기원이 된다.

일종의 사제 조직을 만들었다. 사제 조직은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공무원으로 그렇다고 성직자는 아니었다. 사제 조직 최고 수장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673 ~ B.C. 64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라틴계 로마인으로 인근에 있던 알바 롱가를 정복했다. 알바 롱가의 주민들을 로마로 강제 이주시키고 알바 롱가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유력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이 시기에 알바 롱가 주민의 유입으로 인원이 늘어나 로마의 군사 병력이 또 증대되었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642 ~ B.C. 617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사비니계 로마인으로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외손자이다. 군사적 요충지인 자니콜로 언덕과 7개의 언덕(팔라티누스, 아벤티누스 등) 사이의 테베레 강에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한다. 평화시에는 로마 시 본거지인 7개의 언덕에 거주하다 유사시 자니콜로 언덕으로 대피하기 위해 건설한 다리이다.

로마에서 약 20km 떨어진 티레니아 해에 인접한 항구 도시 오스티아를 정복해 로마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엔 소금이 화폐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는 건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616 ~ B.C. 579

제5대 왕은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으로 에트루리아인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에 들어와 살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알파벳을 전파[2]했고 건축과 토목 기술을 전파해주었다.

로마인들은 주로 언덕 쪽에 거주하고 언덕 아래 쪽엔 습기가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로마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지하 수로를 건설해 지면에 있는 물을 다 빼내 테베레 강으로 흘러보내서 언덕 아래 지역들을 평지로 만들고 돌로 포장해 넓은 광장을 만들어냈다. 광장(포럼)은 이후 정치 경제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규모의 토목 건축 사업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로마인들의 생활 수준을 높였다. 이 때 원로원 의원이 200명으로 늘어났다. 로마의 인구 수가 많아졌으므로 원로원 의원 수도 늘어나는 게 당연지사. 이후 왕정 말기 공화정 초기엔 원로원 의원 수는 300명이 된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578 ~ B.C. 535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사위이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이 인물을 데려다 키웠다. 이 인물은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이 된 특수 사례로 민회의 승인이 없었다. 세르비우스 성벽을 구축하고 장인의 토목 건축 사업을 이어받아 마르스 광장을 신설한다. 마르스 광장은 군사 집결지이자 민회의 투표 장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군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제6대 왕 이전에는 백인대(100명)가 군 편제의 최소 단위였다. 로마는 왕정 초기 때 3부족이 있었고 한 부족당 10개의 쿠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쿠리아'란 로마의 행정구역 단위이다. 각 쿠리아마다 백인대를 하나씩 만들었었다. 보병 기준으로 보면 1개의 쿠리아당 백인대 하나이므로 한 부족(=10개 쿠리아) 당 백인대 10개이므로 병력 1000명, 로마엔 세 부족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로마의 총 보병 병력은 3000명이었다.

기병은 1개의 쿠리아 당 10명씩, 한 부족(=10개 쿠리아)이면 병력 100명, 로마의 총 기병 병력은 300명이었다. 보병과 기병을 합한 로마의 총 병력은 3300명. 제6대 왕 이전까지 로마의 병력 구조는 이러하였다.

군제 개편을 위해 모든 로마 시민권자들을 재산 상태에 따라 6계급으로 구분한다. 제1계급이 재산이 가장 많은 자들이고 최하위 계급인 제6계급이 재산이 없는 자들이다. 제6계급에서 제1계급으로 갈수록 시민이 부유해진다. 다음 표는 보병 기준이다.

계급 선출해야 할 백인대 수 병력
제1계급 80 8000명
제2계급 20 2000명
제3계급 20 2000명
제4계급 20 2000명
제5계급 30 3000명
제6계급 5 500명

제1계급에서 제6계급까지의 보병을 합하면 총 175백인대(=17500명)가 된다.
제1계급에서 백인대를 가장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지킬 게(재산) 있어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제5계급에서 백인대를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모든 계급 중에서 제5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제6계급은 흔히 프로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으며 그 뜻은 가진 게 자식밖에 없는 자라는 뜻이다.[3] 제6계급은 비전투부대로 갑옷이나 무기를 제작하거나 전투 개시 때 나팔을 부는 역할을 맡았다. 비전투부대인 이유는 제6계급은 지킬 게 없는 데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병은 모든 계급들 중 제1계급만 18백인대를 창출하도록 했고 다른 계급에선 기병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써 기병까지 합하면 로마의 총 병력은 175백인대(=17500명) + 18백인대(=1800명) = 193백인대(= 19300명)가 되었다. 유심히 보면 로마의 총 193백인대 중에 제1계급만 기병, 보병을 합해 총 98백인대이다. 이는 과반수인데 로마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제1계급에 있었다는 걸 나타내며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병역의 의무도 가장 많지만 그에 걸맞게 권리도 가장 많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백인회가 창설되면서 쿠리아회의 기존 기능인 전쟁 승인, 왕 선출 등의 권리를 백인회가 이어받았다.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편집 | 원본 편집]

재위 기간은 B.C. 534 ~ B.C. 509

이 이름에서 ‘수페르부스’는 ‘건방진, 거만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후대에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린 인물이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손자이자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사위이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툴리아와 혼인했다. 그리고 툴리우스에게 자객을 보낸다. 툴리아는 자객의 공격을 받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버지를 마차로 짓밟는다. 수페르부스는 무력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무시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를 하였다.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하는 등의 업적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민중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 이 인물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셋째 아들 섹스 투스라는 아들은 자신의 친척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사랑했다. 콜라티누스가 전쟁터를 나간 틈을 타서 루크레티아를 겁탈하고 루크레티아는 자살한다.

로마인들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가족을 로마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툴리아는 도주했고 섹스 투스도 도주하려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각주

  1. 당시 일종의 민회이다.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되어있고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의견 기구.
  2. 알파벳은 페니키아에서 최초로 사용되어 이후 그리스, 남부 이탈리아 지역, 에트루리아 순으로 전파되었다.
  3. 재산이 거의 없다는 의미이다.
이 문서의 전체 혹은 일부는 로마 제국 문서의 718629판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