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금성산성

담양 금성산성
금성산성.jpg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등
대지면적 1,384,501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353호
지정일 1991년 8월 24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금성산성(金城山城)은 호남 3대 산성 중 하나로 불리는 산성으로 담양군순창군 일대의 산자락인 금성산을 비롯하여 연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 등의 산지의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이다.

금성산성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사절요의 우왕 6년(1830년), 왜구의 대규모 침탈과 관련한 기록이 최초이며 최초 축성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기라고 까지 하는 등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9년에 성의 보수를 한 이후 광해군 2년(1610년)에 대규모 보수공사를 하면서 이 당시 내성을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내성 안에 관청이 들어섰으며(광해군 14년/1622년), 효종대에는 성위에 여장을 설치하면서 성의 방어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져 그 여파로 성 내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이후 한국전쟁 당시 그나마 남아있던 절인 보국사도 전소되어 현재는 그 터와 주춧돌만 확인되고 있다.

이 성의 총 둘레는 포곡식의 외성 기준으로 6,486m, 테뫼식의 내성은 859m, 도합 7,345의 길이의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으로 성문 부근을 제외한 주변 지형이 모두 절벽이라 접근이 어려운 특성과 함께 주변의 산들 중 산성보다 높은 고지가 없는 천혜의 요새이며, 성 내에 식수원을 가지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내부에는 군량미 창고와 객사, 보국사, 관아 등의 건물이 10여동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터만 남아있고 문루도 모두 파괴되었었으나 1995년 성을 보수공사하기 시작, 현재는 남문인 보국문, 충용문의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편집 | 원본 편집]

금성산성은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이기도 하다.

딤양 금성산성은 호남창의회맹소 전투지로 이는 1908년 의병전쟁 당시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 규대가 규합하여 결성한 연합의병부대의 지휘부로 기삼연이 그 대장이었다.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 본진은 1908년 1월 혹한을 피하고 전열정비를 위해 금성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의병 부대의 도향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습격으로 의병 30여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하였으며 대장인 기삼연은 인근에 몸을 숨겼으나 일제의 추격에 의해 붙잡혔고 의병들의 구출작전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의병의 활동 거점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남문은 보국문-충용문으로 2개의 성문을 연속해서 통과해야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며 보국문쪽의 성벽이 능선을 따라 돌출된 옹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등산객의 상당수는 이 2개 문을 통과하여 성으로 접근한다(산 아래 주차장 기준 등산거리 1.5km내외)
  • 성 내에 있던 보국사는 터만 남아있고 현재는 동자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헌데 이쪽 절의 승려들은 일반적인 승려가 아니라 무술 수련을 하는 승려들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