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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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振.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월 13일 평안북도 강계군 이서면 등공동(현 자강도 만포시 등공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무렵 서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여 거리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말에 전협, 최익환(崔益煥) 등이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전협, 최익환 등은 그 해 10월 초순경 대동단의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 운동과 같은 대대적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 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다. 이때 김종진은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 장소로 제공하고, 대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의 상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고, 그 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의친왕 일행이 붙잡혀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김종진은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28일 김종진을 비롯한 정규식(鄭奎植)[1]·박정선·나창헌·이신애 등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김종진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2년 3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종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정규식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