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悳奎. 호는 애류(崖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1년 8월 7일 경기도 통진도호부 봉성면 석탄리(현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에서 아버지 권인수(權寅壽)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1890년 출생설과 1891년 출생설이 병립하는데, 그와 함께 한글을 연구한 동료 검돌(黑石) 이규영(李奎榮)의 저서 <한글모죽보기>에 따르면, 그는 1891년생이라고 하며, 권덕규가 1919년에 조선신문에 기고한 글에는 자신의 나이가 29세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출생년도는 1891년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년 경성부 휘문의숙에 입학해 1913년 졸업했으며, 이후 모교인 휘문의숙을 비롯해 중앙학교, 중동학교에서 국어 및 국사 교사로서 재직했다.
2009년 권덕규의 저서 <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을 엮은 정재승 교수가 서술한 '권덕규 연보'에 따르면, 권덕규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장지동(張志洞), 이인(李仁)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권덕규는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참여했으며 최남선, 장지영 등과 친분을 맺었다. 그리고 1921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조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1년 8월 27일 동아일보사 주최의 백두산 강연회에서 <조선역사와 백두산>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단군이 탄생한 태백산이 백두산이며 동양의 모든 강산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1921년 12월 3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장지영, 이병기, 신명균, 김윤경, 이상춘, 이규방, 박순용, 이승규, 임경재, 최두선 등 15명 내외와 함께 조선어연구회 총회를 개최했다.
한편, 권덕규는 여러 신문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논설을 기재했다. 그 중 1922년 4월 1일 동아일보에 기재한 논설에서, 그는 어학의 연구의 목적을 다음 셋으로 나누어 분류했다.
1. 가장 자유롭게 말과 글을 구사하고 적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적 방면의 연구
3. 고대의 언어, 문자, 문학 등 인문 발달의 정도를 설명하는 응용적 방면의 연구
2. 언어를 대상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적 방면의 연구
그는 연구의 단계를 실용적 연구에서 과학적 연구(언어학적 연구), 이후 응용적 연구(문헌학적 연구)의 순으로 정리했으며, 한글 연구는 우리 조선인들이 행하여야 하며, 과학적 연구, 즉 언어학적 연구를 수행하여 조선어의 내적 논리를 개발하는 외에, 자매어 등과의 비교 연구 등 문헌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글 연구는 아직 첫 단계인 실용적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1924년 2월 1일, 권덕규는 훈민정음 8회갑 기념회에 참석해 '정음의 유래'에 대해 강연했다. 그리고 1924년에 중앙고보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었으며, 1926년 9월 29일 인사동에서 정음회(正音會)를 조직했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 신민회 주최로 훈민정음선포 제8회갑 기념회를 거행하고 이 날을 '가갸날'로 정했으며, 동시에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를 담당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12월 27일부터 12월 30일에는 조선어연구회 주최 조선어강습회를 보성고보에서 개최하여 문법에 대해 강연했다. 또한 1927년 한글사를 설립하고 <한글>을 창간했다.
이후 <동광> 잡지에서 한글에 관한 토론에 참석한 그는 자신의 한글 연구 방식에 대한 공격에 직면했다. 역시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안확은 1927년 동광에 글을 게재해 '그리+ -어'의 구조를 가지는 용언의 활용법을 '그려'로 하지 않고 '그리어'로 쓰는 권덕규를 겨냥해 "이것은 한글의 문법과 맞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안확은 권덕규가 집필한 교재용, 참고용 한글문법서에 대해서도 '구슬'과 '구실'의 구분을 통한 표준어 준별 태도에 대한 비판, 습관소리(습관음)라는 개념의 불투명성에 대한 비판같은 어학적인 비판 뿐만 아니라 권덕규 등 대종교 일각의 인사들이 한자를 변형해서 쓰는 태도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권덕규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1928년 어느 날, 사단이 나고 말았다. 이병희(李丙熹)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번은 문일평, 안확, 이병희, 그리고 권덕규가 함께 술을 마시며 언어학에 대해 논하던 중 안확이 권덕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자네는 글도 거칠고 성격도 못되었어...."하면서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자 권덕규는 화가 치밀어 별안간 술잔을 들어 안확의 귀퉁이를 갈겼고, 이 바람에 안확의 귀에 피가 났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한 자리에 함께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927년경 중앙고등보통학교 동창회 학예부장으로서 <교우> 창간을 지도했지만 여러 차례 검열에 걸려 기사가 차압되고 삭제되는 일이 반복되자 그해 10월 21일 '금번 중앙고보 교원 일동의 사퇴하는 사정을 사회제현에 고함'을 발표하고 중앙고보 교원을 사퇴했다. 이후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준비위원을 역임했고 1931년 조선어학회 순회강연에 강사로 활동했으며,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했고, 1934년 진단학회 찬조회원, 1935년 조선어사전편찬회 편찬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35년 8월 5일 조선어 표준어 제2회의에 위원으로 참가한 그는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어학회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에 부임하여 고어와 궁중어를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조선어사전 편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1940년경 중풍으로 쓰러져 조선어학회에서의 활동을 중단했으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신병으로 인해 불구속 입건되었고 이듬해 4월에 기소중지되었다.
8.15 광복 후, 권덕규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한글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1946년 3월 13일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해 추천위원이 되었고, 그해에 문고본 <을지문덕>을 간행했다. 그러나 1949년 여름에 행방불명되었으며, 1950년 10월 24일 법적으로 사망처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권덕규가 조선어학회에서 기여한 공로가 명확하지 않고 조선어학회 사건 때 기소중지 처리받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점, 말년 행적이 명확하지 않은 점을 들어 오랫동안 서훈을 미뤘다. 그러다 2019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