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진

鞠埰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2년 7월 18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양각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0일 독립선언서 등의 독립의 취지를 기재한 격문, 독립가 등 태극기 한 가마를 광주 학생들에게 배보하고, 광주천변에서 수천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를 행진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지만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2] 1919년 12월 14일 출옥했다.

이후 조선일보사 논설부 촉탁이었던 백관수(白寬洙)의 처남인 점을 활용하여 조선일보사 영업국 직원으로 발탁되었으나, 1925년 10월경 일본 당국의 신문 발행정지 처분[3] 후 신문사를 떠났다. 1927년 8월 22일 광주청년회 위원으로 서;ㄴ임되었으며, 광주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10월 29일 흥학관에서 열린 신간회 광주지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뽑혔고, 재만 조선동포가 중국 관헌에게 박해를 받는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릴 시민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4월 18일 전남청년연맹 간부 장석천 등과 함께 전라남도경찰부에 체포되어 불온 선전물’을 인쇄하여 광주와 송정리 등 시내 곳곳에 부착하고 배포·우송한 혐의를 받고,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5월 초에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간부 다수가 체포되어 해체 위기에 처한 조선청년총동맹을 부흥하기 위해 1929년 4월 12일에 개최된 확대위원 간담회에서 장석천과 함께 광주 지역 준비위원을 맡았으며[4], 4월 25일에는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5] 5월 상순경 경성에서 이항발(李恒發) 등 이른바 ‘서울계’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청년회를 조직하자, 5월 말경 전라도 책임을 맡은 장석천의 권유로 가입했다. 9월 13일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허헌 집행위원장과 황상규 등을 광주로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 국채진은 이 소식을 장석천에게 전달하고, 시위 확대를 협의했다. 그 과정에서 전남의 각 단체를 방문하여 진상을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11월 중순 장석천의 권유에 따라 상경하였고, 11월 18일 경성중앙청년동맹 간부 곽양훈(郭良勳)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시키는 방안을 협의했다. 29일 밤부터 사흘 동안 수은동 김현묘(金賢妙)의 집에서 격문 약 2만 매를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1930년 1월 종로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127명이 검거되었다.[6] 이때 그는 주목자로 지목되었지만, 수사를 피해 도피하였다. 일경은 수개월간 추적했지만, 끝내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소재불명을 사유로 기소중지하였다.[7]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국채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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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