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경

高哉景. 이명은 고택량(高澤諒).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10월 6일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3월 26일 함양읍 장날을 기해 군중이 모이는 걸 기회삼아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기로 마음먹고, 3월 25일 안의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이에 집합하라"는 내용의 글을 지면에 기재한 뒤, 함양군 수차면 상백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김석권 집 앞 도로 옆의 수목에 붙였다. 그러나 경찰의 단속이 심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후 정규환(鄭圭桓)과 공모하여 자산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내기로 결의하고, 1919년 8월 15일 오전 1시경 함양군 수차면 내백리 차우진 집에 이르러 자신은 옥외에서 망을 보고, 정규환은 실내로 침입하여 차우진에게 "우리는 조선독립을 도모하는 결사대원이다. 운동자금을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차우진이 소지금이 없다고 답하자, 정규환은 음력 10월 12일까지 10,000원을 준비하라고 하고 집을 떠났다.

그 후 음력 10월 4일경, 정규환은 초고를 작성하고 고재경을 이를 베껴서 차우진에게 "너는 속히 50원을 남효리 임천석 집으로 가지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집에 불을 지르고 너를 참살할 것이라"는 내용을 기재한 협박문 1통을 작성한 후 정재원을 설득하여 이에 가담하게 하였다. 양력 12월 12일 오전 2시경 정재원은 차우진 집에서 약 3정 떨어진 내백리 입구 암석이 있는 개소에 이르러 차우진에게 보이기 위해 고재경으로부터 "지참금 5,000원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떠나가라"는 내용이 적힌 문서를 그 장소에 놓고 그늘진 부분에 숨어서 차우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고재경은 홀로 차우진 집에 가서 5,000원을 임천석 집으로 가져오라는 협박문을 차우진에게 보여 동행을 재촉하고, 위 암석이 있는 개소로 차우진을 데리고 와서 정재원이 놓은 문서를 읽게 했다. 이때 차우진을 뒤좇아 오던 김성대가 큰 소리로 "도둑이다!"라고 외치자, 고재경 들은 놀라 달아났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0년 1월 9일 1심에서 보안법 위반, 강도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0년 2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1] 1941년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임의구금되었다. 8.15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고, 1950년 7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고재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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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