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놈 끼띠카쫀

타놈 끼띠카쫀
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타넘 끼띠까쩐.jpg
인물 정보
태국의 제10대 총리
임기 1958년 1월 1일 ~ 1958년 10월 20일
1963년 12월 9일 ~ 1973년 10월 14일
전임 폿 사라신 (제9대)
사릿 타나랏 (제11대)
후임 사릿 타나랏 (제11대)
산야 탐마삭 (제12대)

소개[편집 | 원본 편집]

타놈 끼띠카쫀[1](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Thanom Kittikachorn[2], 1911년 8월 11일 ~ 2004년 6월 16일)은 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10대 태국 총리로 재임하며 10년간 군사 독재 정치를 펼쳐왔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타이 경제를 침체시켰으며, 일가와 측근들을 대동하여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학생운동에 대해 대량 학살을 일으키자 군부와 국왕의 외면으로 인해 실각했다.

정치 입문 이전[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8월 11일 딱 주의 태국 현지인과 중국인 핏줄이 섞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왕립육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치앙마이 주에 있는 제7 보병연대에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육군 보병 학교를 다니고 1학년 때 국방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버마의 샨 주에서 활동한 후로 군 선배인 사릿 타나랏을 따랐다. 타나랏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육군 핵심인사로 떠오름에 따라 그도 출세길이 훤히 열렸다. 롭부리 주 군부의 우두머리가 되고, 제11 보병사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1951년에는 태국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2년 뒤 1953년에는 한국전쟁 종식 기념으로 타이를 대표하여 제1지역 사령관의 자격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정치인[편집 | 원본 편집]

1958년 9월 18일, 그는 육군 중장의 신분으로 타나랏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당시 쁠랙 피분송크람 육군 원수가 이끌던 군사 독재 내각은 전복됐고, 덕분에 그는 태국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막후에서는 여전히 타나랏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 허수아비 총리나 다름없었다. 이후 부정선거를 구실로 총리직을 사퇴하고 타나랏에게 넘겨주었다. 4년후 타나랏이 죽은 다음 날에 그는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1963년 12월 9일에 다시 총리직에 오르고, 1968년 6월에 헌법을 개정하였다. 끼띠카쫀 본인은 총리의 지위로 국방장관, 공군 원수 등의 군 주요직을 독식했고, 통일 태국 인민당을 창당했다. 통일 태국 인민당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렇게 내외적으로 힘을 키워나간 그는 반공을 모토를 내세웠으며,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보내서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지원했다. 이 당시 그와 일가, 측근들은 태국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설수록 그는 매카시즘과 권력욕에 휩싸여, 반공을 핑계로 반대파들을 탄압했다. 1971년 11월 17일에는 의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정당 활동과 5인 이상 집회를 금지시켰다. 국회의 기능은 그가 직접 창설한 국가행정자문회의가 대신했다. 행정은 주춤하고 정책은 뒤로 밀려났으며, 남베트남이 망하여 난민들이 유입되었고, 각지에서 테러가 발생하면서 치안도 악화되었다. 경제 또한 심각하게 침체되었다. 인플레이션으로 파업이 횡행하고, 태국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경작지의 부족으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더욱 증가했다. 그래서 1970년대 태국 농민의 1인당 평균 소득은 49달러에 불과했다. 대조적으로 평균 국민 소득은 미화 125달러였고 도시 주민의 평균 국민 소득은 428달러였다.

퇴진[편집 | 원본 편집]

1972년 11월, 각지 명문대학의 학생들이 창설한 NSCT는 일본 상품을 보이콧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것은 끼띠까쫀 내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전략적으로 추진되었지만, 학생들의 의도를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NSCT는 쇼핑 센터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 "반일 식량 주간"을 선포했다. 그에게 새로운 경제 계획을 내세우고 항의 행진을 조직했다. 정당에 대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NSCT의 전략으로 인해 이를 단속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1972년 12월 끼띠까쫀을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둔 채 임시헌법이 공포되었다. 이듬해 람캄행 대학교는 집권 정부에 대한 풍자물을 게시하였는데, 이 풍자는 1973년 4월에 고위 군장교, 사업가, 영화 배우가 실종되어 추락한 퉁야이 사냥 스캔들과 관련이 있다. 그러한 결과로 전국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으며, 유명인들의 죽음은 점차 은폐하기 어려워졌다. NSCT는 잡혀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정부는 시위대를 일으킨 대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반발이 더 거세지자, 정부는 폐쇄조치를 취소하였다.

하지만 군부 독재의 억압은 여전하였다. 그리고 결국 1973년 10월 학생폭동이 일어났고, 학생시위대를 향해 군대가 발포해 수많은 학생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결국 1973년 10월 14일, 군부가 끼띠까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끼띠까쫀 정부는 붕괴됐다. 그는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76년 10월 다시 은밀히 귀국했다. 이후 2004년 사망했다.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국립국어원 표기
  2. 국립국어원의 로마자 표기와 위키백과의 로마자 표기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여러 나라에서 쓰는 로마자 표기에 맞추어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