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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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ióque란 ‘아들에게서’ 또는 ‘아들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원래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이 단어가 없었으나 스페인 톨레도에서 이것을 삽입하여 그리스어 원문의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었다. 지역적 변화에 불과했던 것이 점차 퍼지다 마침내 공식적으로 서로마 교회에 채택되었고 그것이 예루살렘을 통해 정교회 측에 알려지면서 정교회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와 관련된 만큼 필리오케 문제는 당대 가장 중요한 신학 논쟁 중 하나였다. 비잔틴제국 멸망 직전 시도되었던 동서교회의 일치 좌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Filióque란 ‘아들에게서’ 또는 ‘아들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원래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이 단어가 없었으나 스페인 톨레도에서 이것을 삽입하여 그리스어 원문의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었다. 지역적 변화에 불과했던 것이 점차 퍼지다 마침내 공식적으로 서로마 교회에 채택되었고 그것이 예루살렘을 통해 정교회 측에 알려지면서 정교회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와 관련된 만큼 필리오케 문제는 당대 가장 중요한 신학 논쟁 중 하나였다. 비잔틴제국 멸망 직전 시도되었던 동서교회의 일치 좌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현대 천주교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령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에서 Filióque가 없는 신경을 인용함으로써 정교회 및 동방 가톨릭 교회<ref>교황의 수위권은 인정하되 전례는 정교회의 것을 따르는 교회</ref>의 신경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교회가 반발한 이유 중에는 신학적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전 공교회가 참여하는 공의회 없이 임의로 내용을 변개한 것에도 있었기 때문에 필리오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현대 천주교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령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에서 Filióque가 없는 신경을 인용함으로써 정교회 및 동방 가톨릭 교회<ref>교황의 수위권은 인정하되 전례는 정교회의 것을 따르는 교회</ref>의 신경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교회의 신경이 가톨릭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서 인정한 것 뿐이다. 가톨릭이 부정하는 것은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는 명제이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한다'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 또한 정교회가 반발한 이유 중에는 신학적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전 공교회가 참여하는 공의회 없이 임의로 내용을 변개한 것에도 있었기 때문에 필리오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성상===
===성상===
제7차 세계공의회<ref>제2차 니케아 공의회</ref>의 결과 정교회에서는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이콘(Icon)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정교회의 교리 상 성화는 신앙 교육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계시의 한 수단으로서 영적 깨달음을 얻는 통로가 된다. 성화라는 매개를 통해 신자들은 성화의 대상이 되는 예수나 성인의 거룩함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ref>단 성부(聖父)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로 나타내지 않는다.</ref> 그래서 이콘 작가들에게는 예술성이나 미적 감각을 위해 그림을 개선하거나 특정 요소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콘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전승의 보존이며 교회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부터 인물의 묘사, 각종 물건, 색채의 선택까지 모두 규정에 따라 전통적인 도상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s>그래서 옛날 거나 요즘 거나 비슷하게 생겼다</s>
제7차 세계공의회<ref>제2차 니케아 공의회</ref>의 결과 정교회에서는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이콘(Icon)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정교회의 교리 상 성화는 신앙 교육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계시의 한 수단으로서 영적 깨달음을 얻는 통로가 된다. 성화라는 매개를 통해 신자들은 성화의 대상이 되는 예수나 성인의 거룩함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ref>단 성부(聖父)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로 나타내지 않는다.</ref> 그래서 이콘 작가들에게는 예술성이나 미적 감각을 위해 그림을 개선하거나 특정 요소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콘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전승의 보존이며 교회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부터 인물의 묘사, 각종 물건, 색채의 선택까지 모두 규정에 따라 전통적인 도상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s>그래서 옛날 거나 요즘 거나 비슷하게 생겼다</s>

2015년 7월 13일 (월) 02:23 판

틀:종교

개요

정교회는 초기 기독교부터 이어온 정통 교회라는 뜻으로 그리스어로는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라고 한다. 현 수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겸 세계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정교회의 조직과 명칭

흔히 그리스 정교, 러시아 정교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정교회의 조직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착오이다. 동등한 지위를 지닌 5개 총대주교구[1] 및 10개 독립교회[2]의 연합체가 정교회이다. 따라서 정교회 조직 전체를 일컫는 단어에 지역명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며 정교회, 혹은 동방 정교회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및 총대주교가 어떠한 실질적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위한 상징과 수단으로서 인정될뿐이다.

교리

  • 지역주의
    • 동일한 전례를 가지지만 각 지역 교회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 성경 및 전례에 사용되는 언어로 각 지역의 고유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찍부터 허용되었다.

필리오케 문제

Filióque란 ‘아들에게서’ 또는 ‘아들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원래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이 단어가 없었으나 스페인 톨레도에서 이것을 삽입하여 그리스어 원문의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가 라틴어 번역본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바뀌었다. 지역적 변화에 불과했던 것이 점차 퍼지다 마침내 공식적으로 서로마 교회에 채택되었고 그것이 예루살렘을 통해 정교회 측에 알려지면서 정교회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와 관련된 만큼 필리오케 문제는 당대 가장 중요한 신학 논쟁 중 하나였다. 비잔틴제국 멸망 직전 시도되었던 동서교회의 일치 좌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현대 천주교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령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에서 Filióque가 없는 신경을 인용함으로써 정교회 및 동방 가톨릭 교회[3]의 신경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교회의 신경이 가톨릭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서 인정한 것 뿐이다. 가톨릭이 부정하는 것은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는 명제이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한다'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 또한 정교회가 반발한 이유 중에는 신학적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전 공교회가 참여하는 공의회 없이 임의로 내용을 변개한 것에도 있었기 때문에 필리오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성상

제7차 세계공의회[4]의 결과 정교회에서는 모자이크, 프레스코화, 이콘(Icon)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정교회의 교리 상 성화는 신앙 교육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계시의 한 수단으로서 영적 깨달음을 얻는 통로가 된다. 성화라는 매개를 통해 신자들은 성화의 대상이 되는 예수나 성인의 거룩함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5] 그래서 이콘 작가들에게는 예술성이나 미적 감각을 위해 그림을 개선하거나 특정 요소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콘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전승의 보존이며 교회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부터 인물의 묘사, 각종 물건, 색채의 선택까지 모두 규정에 따라 전통적인 도상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그래서 옛날 거나 요즘 거나 비슷하게 생겼다

성모 마리아 공경

  • '하느님인 예수'의 어머니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이자 최고 성인으로 공경한다.[6]
  • 성모의 평생동정을 믿는다. [7]
  • 성모승천을 인정하지 않는다
    • 정확하게는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믿는 것은 상관없다.
    • 정교회의 전승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임종할 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11명이 그 자리에 있었고 3일 후 뒤늦게 도착한 성 토마스가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하는 성모를 목격, 성모의 허리띠를 받은 뒤 다른 11명에게 성모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시켰다고 한다.
  • 성모의 무염시태[8]를 인정하지 않는다.
    • 성모 마리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으나, 성모희보[9]의 순간 그 원죄가 씻겨졌다는 무염수태 교리를 채택하였다.

전례

7성사

세례

견진

고백

성체성혈

미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식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례인데, 이 때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정교회의 관점은 가톨릭의 성변화와 거의 같다. 다만 축성된 성체에 성령이 강림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神化된 몸이 된다고 여긴다.

성찬에 사용되는 빵은 누룩을 넣은 것이다. 정교회 교리상 최후의 만찬이 일어난 시점이 유월절 전날이었으며 성경에서 이 빵을 지칭하는 ‘아르토스’라는 단어가 누룩을 넣은 빵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빵이 부풀어오르는 것에 부활의 의미가 있다. 성체에는 밀가루, 물, 누룩, 소금 외의 재료가 들어가서는 안된다. 빵에는 굽기 전에 도장을 찍고, 도장이 찍힌 부분만을 도려내 성사에 사용한다. 큰 빵에 큰 도장을 찍어 쓰는 것이 그리스식이고 작은 빵 여럿에 각각 도장을 찍어 사용하는 것이 러시아식이다. 한국 정교회에서는 그리스식을 따른다. 도려내고 남은 부분의 빵은 ‘안티트론’이라 하여 미사에 참여한 사람 중 성체를 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양형영성체[10]만을 인정한다. 도려낸 빵은 성작의 포도주와 섞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렇게 섞인 것을 무릎을 꿇고 양손을 X자로 교차시켜[11] 손을 어깨에 댄 신자에게 사제가 스푼으로 떠서 나누어주게 된다. 이 때 흘릴 위험 및 위생상의 문제로 스푼이 입술이나 혀에 닿지 않아야한다.

성유

결혼

신품

새로운 사제를 임명하는 것으로 주교만이 주관할 수 있다.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남성도 신부로 서품될 수 있는데, 반대로 신부가 결혼할 수는 없다. 주교는 전통적으로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내와 사별한 사제, 수도사제 가운데서 뽑는다. 초기교회의 전통에 따라 이 주교선출 과정에 평신도도 참여한다.

역사

초기 교회의 5개 총대주교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의 대분열

성상논쟁

원래 성상문제는 비잔틴 제국 내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의 신학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단성론의 영향이 강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러한 신성을 물리적인 실체로 표현하는 성상, 성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에 따라 성상 파괴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대해 안티오키아학파를 중심으로 성상 파괴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려 이 문제는 비잔틴 제국 전체로 확대되었다. 황제의 칙령에 반발하는 교회는 무력으로 제압되었으며[12] 이것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보아 칙령은 신학적 이유보다는 교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황제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성상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옮긴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보다 정치적 우위에 있었고 로마 교황들 또한 황제의 신하로서 동로마 황제에게 군주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그래서 서로마제국 멸망 뒤에도 동로마 황제는 서로마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성상파괴령은 로마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지역에도 내려졌다. 이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게르만족에게 포교하기 위해서는 성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발, 이탈리아에서 거둔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으며 실상은 비잔틴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격분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 교황이 행사했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기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13]

정교회와 교회일치운동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측에서는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교회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정교회에 관심을 가졌다. 155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아사프 2세가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독일 비텐베르크에 사절을 파견하고 1573년 튀빙엔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예레미야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개신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청하는 등 상호간의 접촉이 이어졌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부 교구에서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 서품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으나 이는 교리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종교 존중의 성격이 더 강했다.

현대 정교회는 1964년 이후 비칼케돈파 교회[14]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로마 가톨릭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화의 장을 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령을 통해 정교회를 ‘갈라진 형제’로 일컬으며 정교회의 성사와 사제 서품을 인정하였고 1965년 양 교회는 1054년의 상호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또 1979년부터 이후 2000년대까지 양대 보편교회는 지속적인 대화위원회를 열어 신학적 논의를 이어갔다. 두 종교의 수장들도 서로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공의회 진행 기간 중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팔레스타인을 방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를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가 공식적인 초청으로 이스탄불과 로마를 각각 방문하였으며 최근에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즉위미사에 동서분열 이후 처음으로 총대주교가 참석하는 행보를 보였다.
정말로 미사를 볼 곳이 없을 경우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 미사에 참여하거나 정교회 신자가 가톨릭 미사에 참여해도 미사를 본 것으로 인정해준다.

그 외에도 정교회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에 가입,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단들과도 계속해서 신학적 교류를 이뤄나가고 있다.

한국의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15] 산하 한국대교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2015년 현재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대주교[16]가 한국대주교에 봉직하고 있다. 1개 대성당, 9개 성당, 2개 수도원이 있고 4000여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각주

  1.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2. 그리스, 러시아, 조지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 폴란드, 체코와 슬로바키아, 키프로스
  3. 교황의 수위권은 인정하되 전례는 정교회의 것을 따르는 교회
  4. 제2차 니케아 공의회
  5. 단 성부(聖父)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로 나타내지 않는다.
  6. 일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모 공경에 관해서 하느님 대신 성모를 숭배한다며 마리아교니 하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하는데, 성모는 단지 성인 중의 성인이지 신은 아니다. 성모에게 바치는 기도도, 내용을 잘 보면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에게 '전달'해달라는 것이다.예수님 엄마니까 내 말보다는 더 잘들어주시겠지 나주 성모동산이 왜 이단인지 생각해보자.
  7. 사실 개신교도 초기에 칼빈은 마리아가 평생동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형제들은 사촌일 뿐이었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8.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되심.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에게 성모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성모에게 원죄가 없었음을 믿는 교리. 프랑스 루르드에서 발현한 성모가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근거로 교황 비오 9세가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선포하였다.
  9. 개신교에서 수태고지, 가톨릭에서 성모영보라고 하는,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찾아와 예수를 낳게될 것임을 알린 사건
  10. 빵과 포도주 둘 다 영하는(먹는) 것
  11. 가톨릭에서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12. 일부 교과서 및 서적에서는 비잔틴의 교회제도를 황제교황주의라 하여 황제가 종교적 우두머리를 겸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서방의 교황과 군주들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비잔틴의 황제와 교회는 독립된 객체로서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13. 가톨릭 교황=로마 총대주교. 각 총대주교가 동등하기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14. 제4차 세계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 서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교회.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서 나눠지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공의회의 결의 대신 그 속성이 ‘육화된 하나의 본성’, 즉 신성이 육화하여 인성도 지니게 되었다는 교리를 믿는다. 다만 예수가 오로지 신성만을 지녔다는 단성론(아리우스파)이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양성론(네스토리우스파)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며 이 두 이론은 비칼케돈파 교회에서도 이단으로 간주된다.
  15.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세계총대주교를 겸한다
  16. 한국명 조봉암.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어학과 교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