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성지

이진성지
이진성지.jpg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번지
문화재 정보
종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20호
지정일 1988년 12월 21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해안가에 자리한 석성(石城)으로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을 이 곳에 설치한 것이 시초로 이후 1555년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1588년 권관이 부임하는 진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전력이 대폭 증강되었다가 이후 인조 5년인 1627년에 만호진으로 승격한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이진성은 이 당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상 마을 남쪽과 북쪽 양측에 언덕이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마안봉형(말 안장 모양)의 형세이며 성의 모습은 이러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남쪽과 북쪽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타원형의 성곽으로 전형적인 외축내탁법에 의해 쌓은 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940m로 원래 총 연장은 2.5km에 달하는 꽤 큰 성이었다. 성문의 터는 후대에 도로 개설 등으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남문과 서문의 자리는 현재도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편이다. 특히 서문이 있던 자리는 문을 달았던 기초석 2개와 길이 34m의 옹성과 수구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등 보존 상태는 어느 정도 괜찮은 편이다.

이진진 관련 기록[1][편집 | 원본 편집]

이진진은 1588년 진을 세운 후 달량진 사변 후인 1597년 종9품의 권관진이 설치되었다가 1627년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1627년에는 만호진으로 승격되어 병선 10여 척, 정규군 200여 명이 주둔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보면 이진진은 군 남쪽 120리에 있는 둘레 1,470척,높이 8척의 석성으로 쌓았으며, 우물 2개가 있고, 종 4품의 수군만호 밑에 군관 18명,관리 18명,지인 5명, 사령 37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남읍지에는 전선 1척,병선 1척,사후성 2척과 대변군관 12명,진리 18명, 사령 6명,군뢰(軍年) 2명, 방군 2기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화유적총람 에는 둘레 2.5km의 성지로 1648년(인조 26)에 만호(각 진에 배치한 종4품의 무관직)를 두어 성을 세웠고,성 주위로 바다 호수를 만들어 왜군이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이진진은 1895년 수군이 폐진될 당시 폐진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수군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게 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남해안 각지를 돌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면서 조선수군을 재건하던 당시 진도 벽파진으로 향하던 도중 토사곽란으로 이 곳 이진성에 머물면서(1597년 8월 20~24일) 성 안의 새물을 마시면서 몸을 치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에도 이진성지 내부에는 북문과 남문 인근에 2개의 우물이 있으며 그 중 남문터 인근에 있는 우물에는 장군샘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바로 이 우물이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였다는 우물이다.
  • 이진은 조선시대 당시 제주도로 가는 항로를 통제하던 항구이기도 했다. 이진성 북동쪽 약 1km지점인 창성(倉城)인 달량진성이 있는데 제주도로 가는 곡물은 이곳 달량진을 통해서 제주도로 나갔으며 반대로 제주도에서 육지로 오는 말은 이진성을 통해 들어왔다.
  • 이 곳의 형상이 배(선박) 모양이라 하여 배진이라고 불리던 것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배를 음차한 "梨"자를 사용하면서 이진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각주

  1. 조선시대 수군진조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술총서 제24집-전라우수영편 이진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