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철교

네크로필리아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7일 (화) 22:24 판
왼쪽의 조중우의교(신 압록강철교)와 오른쪽의 구 압록강철교(흔히 단교라 부른다)의 모습

동수도 가고 철수도 떠난 고향은

허허 벌판 흙 묻은 손을 가슴에 얹고

잊지말자 다짐한 그날

술잔에 나눠 마신 이별이 서러워

기적도 멎어버린 압록강 철교엔

시름없는 조각달이 강물에 흐르네...
— 압록강 철교 이호섭

한반도의 비극의 역사를 상징하는 다리


개요

중국 단둥 시와 북한 신의주시를 연결하고 있는 철교로, 단둥역신의주역을 직접 연결하고 있다. 이 다리에 얽힌 파란만장한 역사의 대부분이 한반도의 비극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이 포인트. 6·25 전쟁 때 파괴되지 않은 신교의 경우에는 1990년 중국북한 간 협의로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로 개칭했고 화물교류에 한해서만 열차와 화물차량이 다니는 상태. 그리고 구교는 파괴되지 않은 중국 측 부분이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북한 측 방향으로는 여전히 60년 이상 파괴된 상태로 있다. 연결되었더라도 어차피 갈 수 없다 뭐 덤으로 구교와 근처에서 바라본 압록강 주변의 경치는 꽤 멋지다. 괜히 명소가 아닌 셈.

현재도 물자가 통행하고 있는 신교량은 꼴도 아닌 북한의 경제를 그나마 버티게 해 주는 중요한 곳으로, 북한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7~80% 정도가 이곳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 하지만 교량 상태도 상태인 되다가 북한이 남의 나라를 자유롭게 오가게 해 줄 곳도 아니기에 물류통행이 아닌 민간인이 이동하지는 않는다.

단순 역사적 의미 말고도 교량 건설 발전사에서도 꽤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구교

파괴된 쪽에서 본 구교

구한말 조선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다리인 한편 당대 기술의 집합체. 그리고 6·25 전쟁의 비극까지 듬뿍 담고 있는 사연 넘치는 다리이다.

압록강 상류 방향 45km 지점에 위치, 단선 철교를 사이에 두고 인도가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특히 일명 케이슨(caisson) 공법을 사용한 90도 십자형 회전방식 개폐형 교량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서양인들에게 Yale River Bridge라 불릴 정도로 동양의 명소로 여겨졌다. 거더의 형태는 활 모양이며 한국 방면에서 아홉 번째 교각이 케이슨 공법으로 시공되어 다리가 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 불필요한 조작남발을 방지하기 위해 개폐방식은 수동이었으며 25마력의 석유발동기 1대가 장비되어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번씩 다리를 열어 배가 통행할 수 있었지만 결국 안전성 문제와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1934년 11월에 개폐를 중지했다.

구 압록강철교는 전형적인 개폐식 교량으로, 하루 오전과 오후에 한번씩 개폐하여 선박 통행이 가능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다리로 부산의 영도대교를 찾을 수 있다.

구교의 역사

경의선의 부설과 당연하지만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다리는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그들의 발판이 되기 위해 신축되었다. 경의선 철도 건설 중에 임시군용철도감부는 직접 열차를 중국까지 운행시키기 위해 철교 건설에 뛰어들었고, 1904년 6월 철교부설 위치 선정을 위해 공병대위를 의주와 봉황성에 파견해 해안지형 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이어 현지 조사팀을 파견하여 유속, 수심, 수량, 지질, 온도변화 등 압록강의 모든 것을 상세히 측정해 3가지의 부설 방안을 제시해 1905년 7월 공사비 지출 예산안으로 편성, 10월 인가를 얻어냈다.

신교

신교의 역사

근처 방문시 특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