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철교

왼쪽의 조중우의교(신 압록강철교)와 오른쪽의 구 압록강철교(흔히 단교라 부른다)의 모습

동수도 가고 철수도 떠난 고향은

허허 벌판 흙 묻은 손을 가슴에 얹고

잊지말자 다짐한 그날

술잔에 나눠 마신 이별이 서러워

기적도 멎어버린 압록강 철교엔

시름없는 조각달이 강물에 흐르네...
— 압록강 철교 이호섭

한반도의 비극의 역사를 상징하는 다리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중국 단둥 시와 북한 신의주시를 연결하고 있는 철교로, 단둥역신의주역을 직접 연결하고 있다. 이 다리에 얽힌 파란만장한 역사의 대부분이 한반도의 비극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이 포인트. 6·25 전쟁 때 파괴되지 않은 신교의 경우에는 1990년 중국북한 간 협의로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로 개칭했고 화물교류에 한해서만 열차와 화물차량이 다니는 상태. 복선교량으로 하나는 도로교로, 하나는 철교로 사용하고 있다. 끊어져 있는 구교는 파괴되지 않은 중국 측 부분을 관광명소로 활용하고 있지만 북한 측 방향으로는 여전히 60년 이상 파괴된 상태로 있다. 연결되었더라도 어차피 갈 수 없다 뭐 덤으로 구교와 근처에서 바라본 압록강 주변의 경치는 꽤 멋지다. 괜히 명소가 아닌 셈.

현재도 단둥세관 관할로 물자가 통행하고 있는 신교량은 꼴도 아닌 북한의 경제를 그나마 버티게 해 주는 중요한 곳으로, 북한으로 공급되는 생필품의 7~80% 정도가 이곳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 출입은 오로지 단둥세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며, 중국 방면에서 오는 트럭은 곡물, 약품 등을 꽉꽉 채워서 오고 반대로 북한 측 트럭은 어쩌다 나는 철광석 정도를 제외하고는 텅텅 비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개판인 북한의 경제사정을 감안하듯 마약거래가 성행해서 감시가 점점 더 강화되는 중이다.

압록강의 야경은 불과 몇십 년 사이에도 처참하게 벌어진 양 국가의 수준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네온사인으로 빛나게 된 단둥과 암흑세계를 방불케 하는 신의주의 모습이 대비된다.

구교(단교, 斷橋)[편집 | 원본 편집]

파괴된 쪽에서 본 구교

구한말 조선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다리인 한편 당대 기술의 집합체. 그리고 6·25 전쟁의 비극까지 듬뿍 담고 있는 사연 넘치는 다리이다.

압록강 상류 방향 45km 지점에 위치, 단선 철교를 사이에 두고 인도가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단교(특히 일명 케이슨(caisson) 공법을 사용한 90도 십자형 회전방식 개폐형 교량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서양인들에게 Yale River Bridge라 불릴 정도로 동양의 명소로 여겨졌다. 거더의 형태는 활 모양이며 한국 방면에서 아홉 번째 교각이 케이슨 공법으로 시공되어 다리가 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 불필요한 조작남발을 방지하기 위해 개폐방식은 수동이었으며 25마력의 석유발동기 1대가 장비되어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번씩 다리를 열어 배가 통행할 수 있었지만 결국 안전성 문제와 실효성 문제, 그리고 진짜 핵심인 이권 문제가 개입되어 1934년 11월에 개폐를 중지했다.

현재 중국에서 보존, 관리하는 '고전적 혁명유적지'의 일부로 입장료 30위안에 관광지로 운영된다. 입구에는 북한을 향해 돌격하는 중공군의 투박한 부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중국 측 설명문에는 '침략자 미군이 중국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의 불씨를 압록강까지 몰고 와서 중국 국경에서 총질을 함으로써 중국 인민에게 엄중한 위협을 가했다'고 되어 있다. [1]

구 압록강철교는 전형적인 개폐식 교량으로, 하루 오전과 오후에 한번씩 개폐하여 선박 통행이 가능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다리로 부산의 영도대교를 찾을 수 있다.

구교의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경의선당연하지만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다리는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그들의 발판이 되기 위해 신축되었다. 한창 러일전쟁중이었던 일본의 계획 중에 대륙으로 군수물자를 직접 수송하기 위해 1904년 5월 경편철도(협궤)로 안봉선(安奉線), 안동(단둥)~봉천(심양)간 철도 부설을 시작했는데, 이 안봉선을 경의선과 연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량의 건설이 추진된 것이다. 군용철도감부는 직접 열차를 중국까지 운행시키기 위해 철교 건설에 뛰어들었고, 1904년 6월 철교부설 위치 선정을 위해 공병대위를 의주와 봉황성에 파견해 해안지형 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이어 현지 조사팀을 파견하여 유속, 수심, 수량, 지질, 온도변화 등 압록강의 모든 것을 상세히 측정해 세 가지 부설 방안을 제시해 1905년 7월 공사비 지출 예산안으로 편성, 10월 인가를 얻어냈다.

제시된 건설 시안

  • 단선철교 총연장 3,211척(呎) 6촌(吋), (약 973m), 300척(약 91미터) 거더 10개와 60척(약 18미터)짜리 트러스 2개, 공사비예산 1,582,082원
  • 1선의 인도교를 포함한 복선철교 3,239척(약 981미터), 200척(약 60미터) 거더 15개와 60척(약 18미터)짜리 트러스 2개, 공사비 예산 2,393,935원
  • 양측의 인도교를 포함한 3선(철도교 단선) 철교 총연장 3,239척(약 981미터), 200척(약 60미터) 거더 15개와 60척(약 18미터)짜리 트러스 2개, 공사비 예산 1,910,780원-채택된 시안
위 제시안에 개폐식에 대한 논의는 없다.

임시군용철교답부의 현지답사 결과로 조선의 의주에서 청국 안동으로 연결할 노선의 A안과 B안이 제시되었다. 1905년 4월 철도기사를 현지에 파견하여 정밀 조사 후 A안을 채택,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게 되면서 진행에 탄력이 붙는 듯 했지만 1907년 12월 17일, 베이징 주재 미국 대리공사 헨리 비 프렛치아, 다음날에 영국 공사 비 엠 죠르단이 베이징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에게 항의공문을 보냄으로써 상황이 국제적으로 비화되었다. 내용은 안동지방의 상업 발달로 수시로 선박이 통행하거나 정박해야 하는데 일본의 교량 가설로 지장을 받기 때문이었다는 것. 따라서 철교 가설 취소 또는 위치 변경, 혹은 철교 계획의 철수까지 요구했다. 미국과 일본이 각각 제기해기는 했지만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계획의 재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08년 1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문제가 이첩되고, 통감부철도관리국은 가교 위치 변경과 개폐식 교량으로의 설계가 검토되었다. 기존 계획 시 출입을 지장받는 선박의 수와 물량 등의 예상치를 세밀히 검토하여 최소한 200여 척이 정박 혹은 항해에 피해를 입는다는 신의주의사청의 결론에 따라 1908년 11월 20일, 개폐식 교량으로 설계 변경이 추진된다.

미국인의 기술협력을 거쳐 1909년 3월 총길이 3,098척(약 938.8m), 교각은 한국 방면으로 6개 61m, 중국 방면으로 6개 91.4m 간격으로 총 12개, 단선철교의 양 옆에 8척(약 2.4m)짜리 인도교가 딸린 개폐식 교량의 설계가 최종 확정되었다.

총 예산은 당시 기준으로 약 233만 원, 1909년 6월 재료 정돈 등을 개시하여 홍수기 이후 9월, 한국 방면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비용의 일부를 청나라에 떠넘기기 위한 협상과 설득이 벌어졌는데, 1901년 4월 4일 일제와 청국 간 각서 조인이 이루어져 협상을 끝내고 그 해 5월부터 중국 방면에서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신교[편집 | 원본 편집]

신교의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