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학생 사건

Hwangjy9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6일 (월) 17:59 판

개요

신의주 학생 사건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 지역의 중학생들이 주도한 반소·반공 시위이며,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로도 불린다. 공산당 측은 시위대에 발포·기총 소사를 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시위 주동자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일부는 월남하여 영락교회, 서북청년회 등 남한 반공세력에 참여하였다. 1956년 11월 23일 열린 신의주학생사건 제11주년 기념식 참가자들은 대통령에게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도록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고[1] 같은 해 12월 17일 문교부는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였으나[2], 반공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배경

해방기 신의주의 상황

용암포 사건

전개

여파

우리 군과 나라의 명예와 가치를 모욕한 군무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조선에서 실로 재앙적인 규모이다.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시‧군들 도처에서는 밤마다 총소리가 울린다. 다른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양호한 평성에서조차 총소리 없이 밤이 지나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음주는 온갖 특이한 사건들과 부도덕한 행동들의 원천으로, 도처에서 관찰된다. 특히 음주는 신의주에서 한창인데,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매음굴(신의주에 70군데가 넘는다)마다 술취한 바쿠스들이 나타난다. 취한 장교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위수부대원들의 묵인 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갖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한 대원(정치부장 추니크(Цуник)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 데미도프(Демидов)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특별히 제공된 위수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함께 있으면서 술취한 바쿠스로 지냈다(그래서 이 방 두 개에서는 군사고문, 대좌 그라포프(Графов), 도위수사령관인 중좌 기르코(Гирко)가 지내기도 하는데, 이 일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다). 도위수사령부 정치 담당 부사령관인 소좌 아탸소프(Атясов)는 우리의 명에 따라 술취한 데미도프에게 제재를 가하려고 했으나, 그는 거친 욕설로 응수하면서 여관방들은 ‘위수사령관 기르코가 손수’ 자신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주에 있는 도위수사령부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성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남아 있던 부사령관 소좌 표도로프(Федоров)는 이틀 동안 원없이 술에 취하느라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자인 부사관만 남아 있었고 심지어 장교조차 한 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장교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위수사령부의 나머지 장교들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대도시 신의주는 이틀 동안 실질적으로 위수사령부의 감시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얼마 전 바로 이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연설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이 된다.
— "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중에서[3]

신의주 학생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