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학생 사건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신의주 학생 사건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 지역의 중학생들이 주도한 반소·반공 시위이며,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로도 불린다. 공산당 측은 시위대에 발포·기총 소사를 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시위 주동자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일부는 월남하여 영락교회, 서북청년회 등 남한 반공세력에 참여하였다. 1956년 11월 23일 열린 신의주학생사건 제11주년 기념식 참가자들은 대통령에게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도록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고[1] 같은 해 12월 17일 문교부는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였으나[2], 반공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소련군의 만행[편집 | 원본 편집]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담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 함석헌, "내가 겪은 新義州 學生 事件" 중에서[3]

우리 군과 나라의 명예와 가치를 모욕한 군무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조선에서 실로 재앙적인 규모이다.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시‧군들 도처에서는 밤마다 총소리가 울린다. 다른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양호한 평성에서조차 총소리 없이 밤이 지나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음주는 온갖 특이한 사건들과 부도덕한 행동들의 원천으로, 도처에서 관찰된다. 특히 음주는 신의주에서 한창인데,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매음굴(신의주에 70군데가 넘는다)마다 술취한 바쿠스들이 나타난다. 취한 장교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위수부대원들의 묵인 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갖는다. (중략)

수많은 병사와 장교들이 매일같이 사방에서 매우 빈번하게 약탈과 폭행 등을 자행하는 것은 이들이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884 БАО(신의주) 출신의 상위 막시모프(Максимов)는 계획적으로 약탈을 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간다. 12월 6일 막시모프는 자동차 종대를 이루고 구성시를 지나다가 운전사 7명과 함께 현지의 조선인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밤새 내내 일행은 여자를 요구하면서 술 마시고 소란을 피우더니 아침이 되자 숙박료도 지불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중략) 이 도시를 떠난 직후 변두리에서 막시모프는 자신의 소총병들 중 한 명과 함께 길 가던 조선인 농부에게 강도짓을 해 180엔을 빼앗았다.
— "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중에서[4]

용암포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여파[편집 | 원본 편집]

신의주 학생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편집 | 원본 편집]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